※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레디 플레이어 원>에 대한 약간 늦은 리뷰를 쓰던 중, 이 영화에 대하여 제기되었던 개연성 논란(?)이 기억나서 일단 이것부터 가볍게 언급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에 소렌토가 웨이드를 죽이려고 다가섰다가 이스터에그를 보고서 단념하는 부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그런 반응도 이해가 가는 것이, 고작 이스터에그가 신기하다는 이유 만으로 온 힘을 다해서 쫓아온 웨이드를 놓치는 것이 다소 당황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 장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소렌토라는 인물의 특성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는 "할리데이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라곤 그의 커피 취향뿐"이라는 대사에서 알 수 있듯, 할리데이와 전적으로 대치되는 인물이다. 소렌토는 오아시스를 현실에서 생생하게 감각할 수 있게 해주는 기구를 팔아서 돈을 번다. 할리데이가 현실과 거리를 둔 순수한 유희의 세계로서의 오아시스를 지향한다면, 소렌토는 현실과 가상의 벽을 거침없이 허물며 오아시스를 현실 자본의 세계로 편입시킨다. 웨이드가 IOI(소렌토의 회사)에서 산 고가의 수트는 그에게 에르테미스의 손길을 생생하게 전달하지만, 반대로 총탄의 충격을 전달하여 그를 상처 입히기도 한다. 이때부터 영화는 현실에 스미는 환상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그러나 소렌토는 현실과 환상의 접목의 위험성에 대한 지각이 없는 인물이다. 웨이드와 친구들은 소렌토의 이런 특성을 이용하여 그를 속이기도 한다(현실에서 감금된 것처럼 속이던 장면). 이 장면은 소렌토가 현실화된 환상의 위험성에 얼마나 무지한지를 보여준다. 그는 다른 인간은 물론 스스로를 위험에 몰아넣으면서도 이를 자각하지 못한다. 그는 인간에 대한 이해 없이 오로지 기술 진보를 향하여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자본을 형상화한다. 소렌토의 이런 성향은 뒤로 갈수록 점점 심해진다. 그는 급기야 오아시스에서 웨이드와 악감정을 쌓고서 현실에서 그를 죽이려고 한다. 이 시점부터 이미 소렌토의 행동은 단순히 사업을 망친 자에 대한 복수로 보기에 다소 과하다. 그것은 차라리 자신의 세계(오아시스)를 부숴버린 원수에 대한 복수극처럼 보인다. 그는 오아시스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리고 마침내 웨이드를 만났을 때 그의 눈 앞에는 이스터에그가 있다. 오아시스의 모든 신비와 권위를 간직한 이스터에그 말이다. 물론 웨이드에게도 이스트에그는 큰 의미가 있겠지만, 오아시스를 현실처럼 받아들이는 소렌토에게 이 순간은 신을 영접한 것과 다름이 없다. 따라서 그는 모든 감정을 날려버리고 그저 무릎 꿇는 것밖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 장면에서 소렌토의 반응은 지극히 자연스럽고도 소렌토다운 것이다. 만일 이 장면에서 소렌토가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서 "이건 고작 가상현실의 달걀이고, 나는 웨이드 네 놈을 잡으러 왔다!"라며 총을 빵야빵야 쏜다면 <레디 플레이어 원>은 반전 영화로 분류해야 된다. 그때 우린 정말 진지하게 이 영화의 개연성에 대해서 긴 토론을 벌여야 할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소렌토의 허망한 투항은 그가 걸어온 향로와 쌓아온 업보에 대한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현실과 환상의 장벽을 무너뜨려서 이익을 추구하던 자는 그가 무너뜨린 장벽에 깔려서 몰락한다. 그렇게 영화는 두 세계의 경계를 붕괴시킨 행동에 대한 대가를 고스란히 돌려주고 있다. 놀라운 것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 냉엄한 형벌을 형상화하는 아름답고 우아한 방식이다. 악인에 대한 처벌의 순간을 빛나는 구체에 대한 선망 어린 눈길로, 눈 녹듯 사라지는 적의로 표현하는 헐리우드 감독이 이 시대에 몇 명이나 있을까. 기쁘게도 우리는 그와 동시대를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