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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May 16. 2018

<원더스트럭> 비평, 코멘트

<씨네21>에 기고한 비평입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원문 http://www.cine21.com/news/view/?idx=6&mag_id=90134





<원더스트럭>, 토드 헤인즈의 염려



두 개의 세계는 만날 수 있을까


무성영화 시대를 살아가는 로즈(밀리센트 시먼스)와 유성영화 시대에 머무는 벤(오크스 페글리). <원더스트럭>(2017)은 두 개의 이질적인 세계가 이리저리 교차하다가 마침내 조우하는 여정을 지켜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화를 본 후 나의 머릿속에서는 한 가지 의문이 떠나질 않았다. 과연 토드 헤인즈는 그의 영화가 그리는 조우의 순간을 정말로 믿을까. 나는 영화가 두 세계의 조우만큼이나 그 사이에 벌어진 간극을 끊임없이 의식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기에 마지막에 이르러 제시되는 해피엔딩 또한 내게는 그리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두 세계 사이의 간극과 다소 의심스러운 결합. 이 글은 그 미묘한 불일치를 응시하며 시작한다.  


판타지를 경유하고서라도 만나고 싶은 세계


로즈와 벤 사이 50년의 시간 차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영화에는 두 인물 간의 간극을 환기하는 순간이 자주 등장한다. 벤이 제이미(제이든 마이클)를 멀찍이서 쫓으며 미국 자연사박물관으로 향할 때 그들 사이의 거리의 간극은 박물관 안에서도 한동안 유지된다. 박물관 역사상 가장 오래된 운석 앞에 선 벤은 거울을 통해 제이미를 보고, 로즈 역시 이 거울을 통해 주변 사람들을 본다. 그 운석은 지구에 떨어진 순간부터 지속된 시간의 흐름을 물화하고 있다. 이 장면은 유구한 시간의 간극을 건너서 다른 이를 마주 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그들은 하나의 매개(거울)를 통해 다른 이를 건너볼 뿐이다. 이처럼 <원더스트럭>은 거리의 간극을 가로지르는 아이들의 여정을 통해 시간의 간극(1927년과 1977년), 그리고 시대의 간극(무성영화와 유성영화)을 사유한다. 간혹 두 개의 세계가 이 틈을 횡단하여 기적적으로 접촉하기도 한다. 그러나 토드 헤인즈가 그 접촉의 순간을 마냥 긍정하는 것 같지는 않다. 로즈가 종이배를 고이 접어서 어디론가 보내는 순간은 영화에 단 두 번 등장한다. 그녀가 “도와주세요”라고 적은 종이배를 띄워 보내자 벤의 집 앞 강물이 찰박대고, 잠시 후 어디론가 전화를 걸던 벤은 그 자리에서 쓰러진다. 로즈는 박물관에서 “내가 있을 곳은 어디인가”라고 적은 종이배를 접어서 운석 위에 올린다. 짤랑대는 종소리가 들려오고 친구 제이미를 따라가던 벤은 늑대 디오라마와 마주친다. 언급한 장면들은 로즈와 벤이 속한 세계가 서로 교감하는 순간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인상 깊게 다가오는 것은 이 장면들에 스며 있는 죽음의 기운이다. 벤이 벼락을 맞고 쓰러졌을 때, 그리고 늑대 디오라마 앞에서 주저앉았을 때 그의 얼굴에는 창백한 푸른빛이 감돈다. 벼락을 맞았다는 벤에게 제이미가 말한다. “벼락을 맞으면 죽어.” 다른 세계와의 접촉은 그 자체로 경이롭지만, 과연 우리는 경이의 순간이 전달하는 충격을 감당할 수 있을까. 나는 토드 헤인즈가 시종 그것을 염려한다고 느낀다. <원더스트럭>에는 판타지를 경유해서라도 접촉하고픈 이질적인 세계에 대한 갈망이 존재하지만, 그것을 접촉한 순간의 충격과 그 충격을 이기지 못했을 때의 파국에 대한 불안 역시 공존한다.


박물관에 간 아이들


두 세계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등장하는 것은 ‘큐레이팅’이다. 영화에는 잡동사니가 가득한 방 한가운데 선 아이의 이미지가 자주 반복된다. 벤의 오두막과 ‘호기심의 방’은 작은 물건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으며, 벤과 로즈가 우연히 마주치는 곳은 박물관과 서점이다. 이곳은 인간이 끝내 지각할 수 없는 유구한 시간의 흐름을 붙잡기 위해 시간의 단편들을 끌어모은다. 영화가 아이들의 눈을 통해 뉴욕을 바라보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일 것이다. 맥락과 상황을 통해 장소를 이해하는 어른과 달리 아이들은 생소하고 투명한 눈으로 공간을 감각한다. 그러므로 다양한 건물과 패션이 북적대는 뉴욕은 아이들에게 하나의 거대한 박물관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잡동사니 중에서도 의미 있는 물건을 선별하는 큐레이터의 안목을 통해 우리는 억겁의 시간 가운데 특별한 사건들과 만나게 된다. 이 영화에서 큐레이터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제이미다. 그가 하는 많은 말들 중에 일부만이 수첩에 적혀서 벤에게 전달된다. 벤이 늑대 디오라마 앞에 섰을 때, 아버지 대니와 관련된 문서를 발견했을 때, 퀸스 미술관에 로즈와 함께 있을 때 제이미는 이 순간들을 카메라로 찍는다. 번쩍이는 카메라의 불빛이 벤을 감전시켰던 번개의 섬광처럼 느껴지는 것이 나만의 착각은 아닐 것이다. 로즈와 벤이 연결되는 운명적인 순간에 벼락이 번쩍이듯, 제이미는 역사에 남을 의미심장한 순간에 카메라의 셔터를 누른다. 그런데 과연 이런 노력들로 두 세계 간의 간극을 메울 수 있을까. 벤이 킨케이드 서점에 들어섰던 순간을 잠시 회상해보자. 월터(톰 누난)와 벤은 한 공간에 있지만 그들의 동선은 미묘하게 어긋난다. 로즈가 서점에 들어왔을 때도 1층의 월터와 로즈, 2층의 벤 사이의 간극은 한동안 유지된다. 그다음 장면에서 영화는 월터와 로즈 사이의 수화를 번역해주지 않기에 그들과 관객 사이에도 간극이 생성된다. 킨케이드 서점은 온 가족이 모인 공간이지만, 이곳은 여러 층위의 간극들로 점철되어 있다. 곧이어 로즈는 벤에게 대니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이야기는 오로지 모형과 사진만으로 재현되는데, 이것은 벤을 쫓아 미술관에 온 제이미의 모습이 생생한 영상으로 재현되는 것과 대비를 이룬다. 우리는 끝내 대니의 삶을 직접 들여다볼 수 없다. 따라서 그의 모습은 벤에게도, 관객에게도 영영 채워지지 않을 공백으로 남는다. 벤이 무언가를 기억해내려고 할 때쯤 미술관은 정전되고, 그가 로즈에게 전하려던 말도 전달되지 않는다. 마지막 순간까지 영화는 무수한 간극과 공백, 그리고 실패를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영화가 두 세계의 조우를 긍정한다고 선뜻 말하기 어려운 이유다. 어쩌면 토드 헤인즈는 로즈와 벤의 만남은 축복하면서도, 두 세계의 완전한 조우는 의심하고 근심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영화의 마지막 결말(세 사람이 손을 잡고 별을 바라보는 장면)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토드 헤인즈의 전작 <캐롤>(2015)이 냉혹한 현실 속에서도 연인의 사랑을 힘껏 끌어안았다고 느낀 이유는 그것이 결말에서 보여준 태도 때문이다. <캐롤>은 연인을 향한 여자의 시선에 오롯이 집중함으로써 그들의 사랑을 긍정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원더스트럭>은 세 사람의 화합에 대한 아름다운 수사로 갑작스레 끝을 맺는다. 이 결말에서 나는 영화가 시종 응시하는 간극을 끌어안는 용기도, 그것에 패배를 선언하는 대범함도 보지 못했다. 나는 이것이 훈훈하고 아름다운 서사 뒤로 스리슬쩍 몸을 숨기는 태도라고 느낀다. 그러나 내가 끝내 <원더스트럭>에 대한 애정을 거둘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보여주는 괴리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가기 때문이다. 영화는 두 세계의 기적적인 접촉을 염원하면서도 그 순간을 두려워하며, 끝내 건널 수 없는 간극도 있었음을 고백한다. 여기에는 토드 헤인즈가 다른 세계에 대하여 품는 선망, 그리고 그만큼 큰 경외와 존중이 있다. 그가 여전히 흥미로운 작가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토드 헤인즈는 전작인 <캐롤>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두 세계의 만남의 순간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은 처음 벤이 번개에 의하여 감전되었던 때처럼 주로 번쩍이는 섬광과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그려집니다. 제이미가 찍는 카메라의 불빛은 번개의 섬광을 연상시키며, 로즈가 처음 엄마를 만났을 때, 벤이 로즈를 서점에서 만났을 때 사물이 아래로 떨어지고(조명등, 책) 그걸 본 어른들은 화들짝 놀랍니다. 로즈는 "너 때문에 놀랐다"는 말을 벤에게 전하기도 합니다. 어린아이들은 번쩍이는 빛과 함께 부모를 만나러 가고, 그 아이들을 마주한 부모들은 아연실색하는 것이죠. 빛과 놀람. 두 가지 운동의 연쇄는 끊임없이 변주되며 <원더스트럭>이 향해가는 만남의 순간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런 운동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번개에 감전된 후 기절했다가 깨어난 벤에게 이모는 종이 위에 상황을 설명하는 그림을 그려줍니다. 그 종이 위에는 번개, 집, 전화기, 벤에게로 이어지는 지그재그의 선이 그려지죠. 이 지그재그의 선, 그러니까 이리저리 움직이고 부딪히다 마침내 한 인물에게 닿는 움직임은 영화가 시종 구현하는 운동입니다. 한 예로 벤이 박물관에서 제이미를 따라 이리저리 뛰다가 늑대 디오라마와 마주치고 충격을 받는 일련의 과정 역시 저 그림의 움직임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벤과 로즈가 큰 도시를 이리저리 누비다 마침내 마주치게 되는 이 영화의 서사 자체가 저 그림과 동일한 운동을 지속하는 것이겠죠.


토드 헤인즈는 기적과도 같은 조우의 짜릿함을 그리는 동시에 그 순간이 전하는 충격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나머지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충격 말이죠. 저는 이것이 토드 헤인즈가 이질적인 세계, 더 나아가 무성영화 시대에 대하여 표하는 경외와 존중이라고 느꼈습니다. 그에게 다른 시대, 그리고 다른 세계는 판타지의 형식을 빌리고 죽음을 감수해야 도달할 수 있는 세계인 셈입니다. 다만 그런 고민을 유지하던 영화가 마지막에 이르러 세 주인공이 손을 잡고 별을 보는 이야기로 끝났을 때, 저는 이것이 그가 고민하던 간극에 대한 답을 회피하고 서사 뒤로 숨는 안온한 태도라고 느껴져서 아쉬웠습니다. 아마도 그 부분이 개봉되던 해 최고의 엔딩이라고 극찬을 받았던 <캐롤>과의 차이일 것입니다. 그러나 토드 헤인즈는 여전히 간극과 만남에 대하여 골몰하며 그 사유의 과정을 영화에 아름답게 새겨나가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그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이유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영화의 자막에 대한 것인데, 대사 중 'hearing child'를 한국어 자막에서 '정상인'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두 명의 청각장애인이 들을 수 있는 아이를 낳았다는 맥락에서 등장하는 단어죠. 이 단어는 '건청인', 혹은 '비장애인'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습니다.

<원더스트럭>이 들리지 않는 아이들의 세계에 얼마나 편견 없이 다가서려고 노력하는지, 그 경험을 얼마나 섬세하게 영화로 구현하려고 하는지 영화를 보신 분들은 느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막의 용어 하나에도 좀 더 섬세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IPTV나 DVD 버전에서는 수정된 자막이 반영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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