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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Nov 16. 2024

[평론가의 삶] 영화관에서 진짜 메모하세요?

네. 합니다.


사실 예전에 평론가들이 영화관에서 메모를 한다는 얘기를 들으면, 뻥이라고 생각했다. 영화 뭐 두 시간밖에 안 되는데 그냥 보고 쓰면 되지, 유난이네. 멋져 보이려고 하는 소리 아니야? 하하하. 하하하... 아니야... 조용히 해, 과거의 나야. 쓰면 기억이 난단 말이야. 현재의 나는 언제나 과거의 나를 배반하지. 영화관이 어둑어둑해지면 나는 조용히 노트와 펜을 꺼내 들고 품에 소중히 끌어안은 채로 메모를 갈기기 시작한다.


영화관 메모를 하며 알게 된 것. 우리가 글씨를 쓸 때 시각에 상당히 의지한다는 점이다. 안 보이는 상태에서 쓴 글씨는 나의 평소 글씨체와 전혀 다르다. 되게 못 씀. 그래, 평소에도 못 쓰는데 이건 차원이 다름. 게다가 글자를 겹쳐 쓸 때가 많다. 예를 들어 '글래디에이터'를 쓴다면 '글' 위에 '래'를 겹쳐 쓴다거나, 'ㄱ' 위에 'ㅡ'를 긋는다거나, 이런 식이다. 


그래서 영화관을 나와서 노트를 펴면, 고대 문자를 해독하는 언어학자가 된 기분이 든다. 대체 뭐라고 쓴 거니..? 그래도 처음 나의 메모를 봤을 때 충격과 비교한다면, 요즘은 퍽 잘 쓰는 편이다. 비결은 왼 손으로 글씨 쓸 자리를 짚어가며 쓰는 것. 그러다 보니 요즘은 볼펜으로 왼쪽 손가락을 찌르는 일이 좀 많다. 하핫. 바보 같아. 혹시 어둠 속에서 글씨 잘 쓰는 비법 아시는 분?



영화관에서 메모하는 내용은 다양하다. 먼저 '중요한 장면'이 나왔을 때 메모한다. 예를 들어 '남편이 전화를 받지 않자, 여자는 남편을 찾아 나섰다'라는 내용은 메모하지 않아도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 장면이 몇 개의 숏으로 구성됐는지, 이때 여자의 표정은 어땠는지 등은 써놓지 않으면 헷갈린다. 더 디테일하게 기억하기 위해 쓴다.


'대사'도 자주 쓰는 것 중 하나다. 나중에 글을 쓰며 대사를 인용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강은 기억나지만 정확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 때가 있다. 당장 마감이 코 앞인데 다시 영화를 볼 수도 없고. 어찌저찌 글은 완성할 수는 있지만, 이럴 때 참 아쉽다. 그래서 나중에 인용할 것 같은 중요 대사는 되도록 써 둔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떠오르는 생각'을 쓰는 일이다. 사실 이거만 써도 된다. 장면, 대사 같은 건 기억을 쥐어짜면 떠오르고, 정 안되면 영화를 다시 봐도 된다. 그런데 영화를 처음 볼 때 순간순간 머리에 스쳐 지나가는 생각은 휘발성이 강해서 한 번 놓치면 돌아오지 않는다. 그 생각을 붙들고 있겠다고 계속 신경을 쓰면, 영화에 집중하기가 어렵다. 한 마디로 영감을 놓치지 않기 위해 메모한다. 이 영감님이 얼마나 섬세하고 심약하신지 우리 모두 아니까. 그분을 잘 붙들기 위해 쓴다.


영화관을 나올 때쯤이면 자잘한 생각들은 대체로 날아가고, 가장 강렬한 인상 하나만 머리에 남는다. 이 영화는 슬프다거나, 폭력에 대한 영화인 것 같다거나. 또 다른 생각도 했었는데 뭐였지... 아 나는 대체 왜 이렇게 빠가사리인가. 이럴 때쯤 노트를 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나만의 보석함 같달까. 이 기분은 진짜 안 해본 사람은 모를 것이다. 



얼마 전 '영화글 쓰는법'을 연재하며 그 첫 단계로 영화에 대해 떠오르는 생각을 '낙서하라'고 설명했다(참고글 아래에). 그러고 보니 영화관에서의 메모가 낙서의 첫 단계일지 모르겠다. 영화 보며 메모도 하고, 나중에 연상되는 생각도 낙서하고. 이러면 평소보다 풍성한 글이 나올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보통의 관객이 영화관에서 종이를 펼치고 메모한다는 게 쉽지는 않다는 걸 알고 있다.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좀 쑥스럽잖아. 흠흠. 이런 경우 영화관에 나오자마자 떠오른 생각을 폰에 기록해 두면 편하다. 나 같은 경우 쓰기 귀찮아서 녹음도 자주 하고. 이런 녹음만으로 글 한 편이 뚝딱 나온 경우도 있는데, 이건 '영화글 쓰는법'에서 다음 기회에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 참고글 https://brunch.co.kr/@comeandplay/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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