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예전에 평론가들이 영화관에서 메모를 한다는 얘기를 들으면, 뻥이라고 생각했다. 영화 뭐 두 시간밖에 안 되는데 그냥 보고 쓰면 되지, 유난이네. 멋져 보이려고 하는 소리 아니야? 하하하. 하하하... 아니야... 조용히 해, 과거의 나야. 안 쓰면 기억이 안 난단 말이야. 현재의 나는 언제나 과거의 나를 배반하지. 영화관이 어둑어둑해지면 나는 조용히 노트와 펜을 꺼내 들고 품에 소중히 끌어안은 채로 메모를 갈기기 시작한다.
영화관 메모를 하며 알게 된 것. 우리가 글씨를 쓸 때 시각에 상당히 의지한다는 점이다. 안 보이는 상태에서 쓴 글씨는 나의 평소 글씨체와 전혀 다르다. 되게 못 씀. 그래, 평소에도 못 쓰는데 이건 차원이 다름. 게다가 글자를 겹쳐 쓸 때가 많다. 예를 들어 '글래디에이터'를 쓴다면 '글' 위에 '래'를 겹쳐 쓴다거나, 'ㄱ' 위에 'ㅡ'를 긋는다거나, 이런 식이다.
그래서 영화관을 나와서 노트를 펴면, 고대 문자를 해독하는 언어학자가 된 기분이 든다. 대체 뭐라고 쓴 거니..? 그래도 처음 나의 메모를 봤을 때 충격과 비교한다면, 요즘은 퍽 잘 쓰는 편이다. 비결은 왼 손으로 글씨 쓸 자리를 짚어가며 쓰는 것. 그러다 보니 요즘은 볼펜으로 왼쪽 손가락을 찌르는 일이 좀 많다. 하핫. 바보 같아. 혹시 어둠 속에서 글씨 잘 쓰는 비법 아시는 분?
영화관에서 메모하는 내용은 다양하다. 먼저 '중요한 장면'이 나왔을 때 메모한다. 예를 들어 '남편이 전화를 받지 않자, 여자는 남편을 찾아 나섰다'라는 내용은 메모하지 않아도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 장면이 몇 개의 숏으로 구성됐는지, 이때 여자의 표정은 어땠는지 등은 써놓지 않으면 헷갈린다. 더 디테일하게 기억하기 위해 쓴다.
'대사'도 자주 쓰는 것 중 하나다. 나중에 글을 쓰며 대사를 인용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강은 기억나지만 정확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 때가 있다. 당장 마감이 코 앞인데 다시 영화를 볼 수도 없고. 어찌저찌 글은 완성할 수는 있지만, 이럴 때 참 아쉽다. 그래서 나중에 인용할 것 같은 중요 대사는 되도록 써 둔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떠오르는 생각'을 쓰는 일이다. 사실 이거만 써도 된다. 장면, 대사 같은 건 기억을 쥐어짜면 떠오르고, 정 안되면 영화를 다시 봐도 된다. 그런데 영화를 처음 볼 때 순간순간 머리에 스쳐 지나가는 생각은 휘발성이 강해서 한 번 놓치면 돌아오지 않는다. 그 생각을 붙들고 있겠다고 계속 신경을 쓰면, 영화에 집중하기가 어렵다. 한 마디로 영감을 놓치지 않기 위해 메모한다. 이 영감님이 얼마나 섬세하고 심약하신지 우리 모두 아니까. 그분을 잘 붙들기 위해 쓴다.
영화관을 나올 때쯤이면 자잘한 생각들은 대체로 날아가고, 가장 강렬한 인상 하나만 머리에 남는다. 이 영화는 슬프다거나, 폭력에 대한 영화인 것 같다거나. 또 다른 생각도 했었는데 뭐였지... 아 나는 대체 왜 이렇게 빠가사리인가. 이럴 때쯤 노트를 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나만의 보석함 같달까. 이 기분은 진짜 안 해본 사람은 모를 것이다.
얼마 전 '영화글 쓰는법'을 연재하며 그 첫 단계로 영화에 대해 떠오르는 생각을 '낙서하라'고 설명했다(참고글 아래에). 그러고 보니 영화관에서의 메모가 낙서의 첫 단계일지 모르겠다. 영화 보며 메모도 하고, 나중에 연상되는 생각도 낙서하고. 이러면 평소보다 풍성한 글이 나올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보통의 관객이 영화관에서 종이를 펼치고 메모한다는 게 쉽지는 않다는 걸 알고 있다.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좀 쑥스럽잖아. 흠흠. 이런 경우 영화관에 나오자마자 떠오른 생각을 폰에 기록해 두면 편하다. 나 같은 경우 쓰기 귀찮아서 녹음도 자주 하고. 이런 녹음만으로 글 한 편이 뚝딱 나온 경우도 있는데, 이건 '영화글 쓰는법'에서 다음 기회에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 참고글 https://brunch.co.kr/@comeandplay/1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