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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Dec 08. 2024

'히든페이스', 해피엔딩 같은 비극적 결말

김대우 감독 전작 '방자전'을 경유해 다시읽는 '히든페이스'

※ 'PD저널'에 기고한 글입니다

영화 '히든페이스' 스틸컷.


최근 극장가에서 좋은 순위를 내고 있는 <히든페이스>는 김대우 감독의 신작이다. 김대우라는 이름은 익숙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의 전작은 우리에게 낯익다. <인간중독>(2014), <방자전>(2010), <음란서생>(2006) 등이다.


김대우의 작품을 꿰뚫는 코드는 (야한 시대극이 아니라) '벽을 넘는 욕망'이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거대한 욕망을 품으며 영화는 시작된다. 하지만 곧 그/그녀는 우리 사이에 넘기 힘든 벽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니까 김대우의 작품에서 '욕망'은 그것을 실현하는 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이 있음을 자각하는 계기로 작동한다. 그 벽은 얼핏 눈에 보이지 않으나 높고 뾰족하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욕망. 기어이 부서지는 벽. 비극의 시작이다. 


김대우의 필모그래피를 볼 때, <히든페이스>는 여러모로 <방자전>과 닮았다. 일단 주요 인물들의 구조가 비슷하다. 또 원작을 각색해, 한국 사회를 떠도는 욕망을 날 것 그대로 새겨넣었다는 점도 공통적이다. <히든페이스>는 원작의 설정에서 뼈대를 가져왔을 뿐, 훨씬 풍성한 디테일을 담고 있다. <방자전>은 '춘향전'을 비틀어, 우리의 상상 속 춘향과 몽룡을 질펀하고 너저분한 현실로 끌어내린다. 


그래서 <히든페이스>는 <방자전>과 나란히 두고 볼 때, 훨씬 흥미로운 영화로 재탄생한다. 특히 결말이 그러하다. 여기에는 김대우, 그리고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일면이 숨겨져 있다. 이번 글에서는 <방자전>을 경유해 <히든페이스>를 다시 읽을 것이다. 아래부터 두 작품의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나오니, 유의해 읽어주길 바란다. 

김대우 감독의 '방자전' 스틸컷


<방자전>에는 세 인물이 나온다. 몽룡(류승범), 춘향(조여정), 그리고 방자(김주혁). 이들의 신분(혹은 권력)은 정확히 세 층위로 나뉜다. 꼭대기에는 몽룡이 있다. 그는 영악하고 잔인하며, 원하는 것을 곧잘 얻는다. 바닥에는 방자(김주혁)이 있다. 그는 불행하게도, 몽룡과 같은 욕망을 품는다. 그의 사랑은 누구보다 깊지만, 자꾸만 신분의 벽에 부딪힌다. 이들의 중간에 춘향(조여정)이 있다. 그녀는 위(몽룡)를 바라보면서도, 아래(방자)를 놓지 못한다. 꼭대기와 바닥의 욕망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그녀의 갈등은 깊어진다.


<히든페이스>의 꼭대기에는 수연(조여정)이 있다. 몽룡과 비슷하면서 미모까지 갖춘 그녀는 엄청난 소유욕의 주인공이다. 바닥에는 미주(박지현)가 있다. 방자처럼 그녀도 꼭대기 인간과 같은 욕망을 품는다. 그리고 중간에 성진(송승헌)이 있다. 그는 수연이 보장하는 성공을 갈망하면서도, 미주에게 끌린다. 삼각 구도 안에서 여러 갈래로 뻗고 얽히는 욕망을 지켜본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닮았다. 


그러나 <방자전>을 현대물로 해석한 듯 보였던 <히든페이스>는 중간부터 변하기 시작한다. 수연과 미주의 비밀이 드러난다. 둘은 사실 오랜 시간 연인처럼 지냈고, 동성애에 대한 시선을 의식해 비밀리에 만났다. <방자전>으로 치자면, 몽룡과 방자가 몰래 사귄 셈이다. 


그렇게 현대판 춘향이, 성진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던 영화는 방향을 틀어 수연과 미주에 집중한다. 수연은 처음에 장난으로 벽장 뒤에 숨어들지만, 그녀에게 버림받은 미주의 복수로 인해 이곳에 갇힌다. 이제 키는 미주가 쥐고 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수연은 이곳을 빠져나오고, 이제는 미주가 도리어 벽장 뒤에 갇히고 만다. <히든페이스>의 원작은 여기에서 막을 내린다.


하지만 <히든페이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마지막 장면. 수연은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고, 성진도 착한 남편으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집에 홀로 남은 수연은 벽장 뒤로 연결된 문을 빼꼼히 연다. 거기에는 족쇄를 찬 채 앉아 있는 미주가 있다. 감옥 같았던 이곳의 분위기는 아늑하고 야릇하게 바뀌었다. 족쇄의 열쇠를 수연에게 건넨 미주는, 유혹적인 얼굴로 그녀를 바라본다. 미주를 온전히 소유한 수연의 만족스러운 얼굴이 클로즈업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연인의 결혼 소식에 치를 떨며 복수에 눈이 멀었던 미주는, 결말에서 갑자기 수연을 위한 노예(영화에 등장하는 표현이다)가 되어 스스로 벽장 뒤에 머문다. 그녀는 초반에 약간의 소동을 부릴 뿐,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던 것(수연의 연인으로 인정받는 것)을 빠르게 포기한다. 그리고 수연의 욕망(벽장 뒤에 미주를 가둬두고 탐하는 것)속으로 흡수된다. 그렇게 수연은 명예(성진)와 욕망(미주), 모두 취하는 데 성공한다. 


영화 '히든페이스' 스틸컷

이 결말은 기이하다. 미주는 수연을 죽이거나, 혹은 죽임을 당할 수 있었다. 이런 결말은 폭력적이지만 자연스럽다. 혹은 원작처럼 끝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미주는 내밀한 욕망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버리는 선택을 한다. 어느새 첼리스트로서의 생활은 의식에서 증발했다. 어차피 이럴 것이라면, 초반에는 왜 화를 냈던 것일까. 에로틱하지만 이상한 이 결말을 납득할 수 있을까?


그런데 작품 내부에서 머물 때 설득력이 없는 이 결말은, 외부에서 바라볼 때 도리어 해석의 여지가 열린다. 어느새 우리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자극의 법칙'를 따르는 요즘이다. 콘텐츠의 가치는 조회수로 매겨지고, 조회수를 올리려면 자극이 필요하며, 그 자극은 시청자의 욕망을 따라간다. 이 구조 안에서 콘텐츠와 시청자는 서로를 자극의 노예로 길들인다. 윤리나 합리를 제쳐두고 욕망을 따르는 선택은 우리에게 더 이상 낯설지 않다. <히든페이스>의 마지막 장면에는 욕망을 따라 어둠 속으로 침잠하는 인간과, 그런 선택을 유도하는 사회가 겹쳐진다.


김대우의 전작에서 좌절한 인간들은 벽을 넘기 위해 종종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이것은 비극적인 결말의 씨앗이 되곤 했다. 하지만 <히든페이스>에는 벽을 넘으려는 결단도, 처절한 좌절도 없다. 이 말끔하고 환상적인 결말은 도리어 우리가 잊은 것이 무엇인지를 되묻게 만든다.


<히든페이스>는 웃음 짓는 수연의 초상으로 마무리된다. 이 마지막 숏에 미주의 자리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녀 스스로 선택한 결말이니 말이다. 언뜻 보아 해피엔딩 같은 <히든페이스>의 마지막은, 실은 김대우의 작품 중 가장 비극적이다.


원문 https://www.pd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8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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