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사남> 천만 비결? '탄핵 정국' 반복된 역사 속에

왕사남.jpeg <왕과 사는 남자> 스틸컷

<왕과 사는 남자>가 천만에 가까운 관객을 소환환 비결은 '탄핵 정국'을 세 차례나 겪은 한국의 질곡 어린 정치사와 떼어놓고 얘기할 수 없다.


<왕사남>의 흥행을 설명할 만한 틀에 박힌 요소는 많다. 전 연령이 즐길만한 가족 영화에다가, 연휴 시기에 개봉했고 대진표도 좋았다. 하지만 이런 설명 만으로는 부족하다. 게다가 <왕사남>의 만듦새는 다소 엉성하고, 단종의 이야기도 우리에게 이미 익숙하다.


다만 <왕사남> 만의 특징이 있으니, 단종을 끝까지 보필하는 엄흥도라는 캐릭터다. (영화 안에서) 그는 폐위된 왕의 마지막을 함께하며 그의 복권을 위해 노력한다. 그는 평범하디 평범한 백성에 불과하다. 그런 이가 신분을 뛰어넘어 왕의 곁을 지킨다는 점은 특별한 감흥을 불러온다.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폐위된 왕의 마지막을 보필한다.

나의 왕에게 따듯한 밥상을 직접 지어 올린다.

이건 상상해 볼 법 하지만 현실에서 결코 이뤄질 수 없는 판타지다. <왕사남>이 건드리는 것은 이토록 비극적이고도 낭만적인 정서다. 그리고 이 정서는 한국 정치사와 관련이 깊다.


노무현, 박근혜, 윤석열 전 대통령까지 우리는 이례적으로 많은 탄핵 사건을 경험했다. 자신이 지지한 대통령이 수모를 겪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진영을 막론하고 온 국민이 한 번쯤 겪은 보편적 경험이 되었다. 그리고 거대한 정치적 사건은 국민의 정서에 영구적인 흔적을 남긴다. 아이러니하게도 수차례의 굴곡을 겪은 지금, 지지했던 대통령의 탄핵 사건 앞에서 느낀 좌절감, 수치심, 지켜주지 못했다는 부채감은 국민 공통의 정서로 흐릿하게 자리 잡았다.


이러한 정서는 이성의 차원이 아니다. 특정 정치인의 탄핵에 찬성할 것인가, 그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나의 지지를 철회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더 깊숙하고 어두우며 은밀한 차원에 숨어있다. 한때 나의 손으로 뽑은 이의 수난을 두 눈으로 지켜보며 느끼는 상처. 그럼에도 내가 직접 나서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패배감. 이건 의식하지 못하는 영역에 조용히 자리한다.


<왕사남>은 이런 마음을 꺼내어 어루만진다. 단종은 정치판에 희생되어 스러져가는 왕이고, 우리는 엄흥도에 접속한다. 우리는 엄흥도를 통해 나의 왕의 마지막을 알현하고 직접 지은 밥을 대접하며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어 그를 수호한다. 그러니까 <왕사남>은 우리가 감히 하지 못했던, 그러나 남몰래 간직했던 염원을 끄집어내어 실현해 주는 작품이다. 그렇게 <왕사남>은 우리가 미처 행하지 못한 애도를 완수한다.


장항준의 필모그래피를 생각해 보건대, 그가 이러한 점을 의도하며 영화를 만든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그런 의도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관객은 더욱 열광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의도가 뻔히 보이는 정치 영화는 보편적으로 소비되지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관객의 측면에서, <왕사남>을 향한 열띤 호응은 한국의 정치사와 무관하지 않다. <왕사남>에 대한 열기가 장항준이 아니라 단종과 엄흥도에 대한 신드롬으로 이어지는 것도, 이 작품의 흥행 동력이 바로 그 비극적인 서사에 있음을 증명한다.


한편, <왕사남>의 흥행은 <서울의 봄>(관객 수 1312만 명)과 연결해서 생각해 볼 만하다. 두 작품은 모두 예상을 뛰어넘는 흥행을 거두었다. 이 작품들은 쿠데타가 일어났던 역사의 한 자락 속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비극을 막아보려는 마지막 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래해 버린 비극 앞에서 느끼는 침통함. 이런 감성을 공유한 작품이 극장의 위기 속에서 이례적으로 천만 관객을 소환한 점은 우연일까? 우리에게는 여전히 풀어내야 할 정서가 남아있는 것 같다.


우리는 종종 현실을 잊고자 극장을 향하지만, 영화는 때로 어떤 거울보다 명징하게 현실을 비춘다. 거기에 호응하는 우리의 욕망은 무섭도록 정확하다. 여전히 영화가 흥미로운 이유다.


# 이 글은 한겨레 신문 김은형 기자님의 질문에 답하며 떠오른 생각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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