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시 버클리는 <햄넷>으로 오늘 열린 제98회 미국 아카데미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수상을 의심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만큼 풍부하며 압도적인 연기였기 때문이죠.
아일랜드 출신의 제시 버클리는 몽환적이며 환상적인 주인공을 누구보다 잘 연기하는 배우입니다. 다소 말이 안 되는 것 같은 세계도 그녀와 만나는 순간 스크린 위에 자연스럽고도 단단하게 안착하죠. 그녀는 <햄넷>에서 숲의 마녀 같기도, 대지의 어머니 같기도 한 모습으로 나타나 한 여인의 일생을 온몸으로 관통합니다. 우리는 아마도 제시 버클리의 시대를 살게 될 것입니다. 그녀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녀가 출연한 <햄넷>에 관해 쓰고 'PD저널'에 기고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떠올릴 때 그 행복 가득한 시작부터 연상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끝이 있기 마련. 사랑의 마지막은 어떠한가요. 마지막을 지키는 사랑은 존재하나요? 그에 관해 집중하며 썼습니다.
송고한 후에 너무 감성적인 글이 아닐까 걱정했는데요. 다행히 클로이 자오 감독이 인터뷰에서 비슷한 말을 한 것을 보고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말을 남겨둡니다.
"무언가를 그토록 깊이 애도하는 것은 그 대상을 지극히 사랑했기 때문이다. 애도의 능력은 사랑하는 능력과 같다."
- 클로이 자오, '씨네21'과의 인터뷰 中 (https://cine21.com/news/view/?mag_id=109453)
매번 맘을 빼앗기는 이야기가 있다. 오르페우스의 신화. 오르페우스는 결혼 후 아내 에우리디케를 잃고 만다. 그는 저승으로 찾아가 아내를 지상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간청한다. 하데스는 소원을 들어주며 한 가지를 경고한다. 네 아내는 너의 뒤를 따라 지상으로 갈 것이다. 그러니 땅에 닿기 전까지 돌아보지 말지어다. 오르페우스는 기뻐하며 지상으로 향하지만, 마지막 순간 유혹을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 아내를 본다. 그 순간 에우리디케의 영혼은 사라지고 만다.
이 이야기가 어째서 그리도 마음에 남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나는 인내나 운명 같은 교훈에는 관심이 없다. 저승의 신을 감화시킬 정도로 정성을 다했으나, 마지막 한 번의 눈 맞춤을 끝으로 허망하게 보내버린 사랑의 절절함이 맘을 할퀼 따름이다. 내게 이건 지극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
최근 개봉한 <햄넷>은 오르페우스의 신화를 테마로 차용한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이건 다름 아닌 이별에 관한 신화라는 것을. 모든 것을 던져 얻은 사랑을 눈앞에서 놓쳤을 때, 오르페우스는 어떤 마음으로 그 순간을 견뎠을까. 어떤 얼굴로 홀로 지상으로 향했을까. 이건 사랑 뒤에 찾아온, 짙고 깊은 어둠을 견디는 마음에 관한 이야기다. 어쩌면 둘은 같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진짜 사랑은 찬란한 빛 뒤의 스산한 어둠까지 껴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햄넷>은 사랑의 끝으로 향하는 영화라고. 인간을 향한 인간의 사랑, 그 마지막을 향하는 영화라고. 이 작품의 수식어는 많다. 2026년 골든글로브 작품상 수상. 토론토영화제 최고상인 관객상 수상. <노매드랜드>로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은 클로이 자오의 신작.
하지만 이번 글에서 나는 오로지 사랑의 한 가지 형태에 대해서만 말할 것이다. 이별 뒤를 견디는 사랑에 대하여. 보내주는 마음에 대하여. 아래부터는 <햄넷>의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다.
영화는 초반부터 주인공들 위로 오르페우스의 신화를 겹쳐놓는다. 윌리엄(폴 메스칼)은 아녜스(제시 버클리)와 데이트를 하며 신화에 관해 들려준다. 이후 둘의 결혼식 장면에서 아녜스는 흰 드레스를 입고 어두운 통로에서 등장하며, 윌리엄은 그녀의 손을 이끈다. 이 장면은 즉각적으로 지상으로 향하는 에우리디케를 연상시키며, 만남과 이별을 품은 사랑의 속성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의 전반부는 사랑이 만들어내는 풍요로운 관계로 충만하다. '마녀'라 불리던 여인 아녜스는 윌리엄과 결혼해 세 아이의 엄마가 된다. 그녀의 신비로움은 강인함으로 변모하여 집안을 일구고 지탱한다.
하지만 곧 영화는 사랑의 다른 차원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아끼기 때문에 보내줘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을. 아녜스는 남편의 재능을 꽃피우기 위하여 그를 런던에 보낸다. 떠나감을 견디는 일도 사랑의 일부일까.
그러다 사건이 벌어진다. 아들 햄넷(자코비 주프)은 고약한 병으로 손쓸 새도 없이 세상을 떠난다. 런던에서 온 윌리엄은 너무 늦게 도착했다가, 일 때문에 너무 일찍 되돌아간다. 아녜스는 그를 원망한다. 하지만 이것이 누구의 잘못도 아닌 그저 불행임을 깨달을 무렵, 햄넷의 죽음으로 인한 그림자는 짙게 드리운다.
영화의 마지막. 아녜스는 런던에 도착해 남편의 연극을 관람한다. 제목은 햄넷. 우리가 익히 아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이다(남편의 이름은 윌리엄 셰익스피어다). 연극 속에서 아들과 같은 이름을 가진 '햄넷'은 죽음을 고민하며 고통스러워한다. 그의 손을 잡는 아녜스. 아들과의 못다한 이별이 이뤄지는 순간. 관객들이 눈물을 떨군다. 이 무대는 아들이 떠나는 순간조차 글을 써야 했던 윌리엄이 보내는 가장 큰 애도일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오르페우스의 신화는 다시 한번 재연된다.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작별. 삶에는 어쩔 수 없는 이별이 생겨나고, 그 순간에 우리는 지독히도 무력하다. 하지만 사랑만은 끝나지 않는다. 이별 뒤에도 이어지는 것. 그 어둠을 버티고 서서 누군가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것. 돌아서서 눈물짓되 우리의 찬란한 한때를 잊지 않는 것. 그 아득한 마음을 설명하기에 사랑이라는 단어는 너무 투박하다. 무슨 말을 덧붙일까. 가늠할 수 없이 지극한 마음은 보는 이를 겸허하게 만든다.
클로이 자오는 <햄넷>을 통해 대담한 전환을 시도한다. 부자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햄릿'을 모자의 이야기로 돌려놓고, 오르페우스 신화를 이별을 중심으로 펼쳐낸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다른 일면에 더 눈길이 간다. 만남과 작별을 품는, 거대한 숲과 같은 사랑.
어찌 보면 <햄넷>은 잔인하다. 인물을 견딜 수 없는 지점까지 밀어붙이니까. 그것을 동력 삼아 나아가니까. 하지만 그 끝에 우린 삶에 관한 진실과 만난다. 그렇게 <햄넷>은 견디고 버티며 끝내 지켜보는 사랑에 관한 설화가 된다. 나는 아마도 한동안 이 영화에 빠져있을 것이다.
원문 https://www.pd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81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