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한국의 중년 여성 배우
한국에서만 관객 수 170만을 넘어선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성공에는 독일의 대표 배우 '산드라 휠러'가 있다. 그녀는 <토니 에드만>부터 시작해 <추락의 해부>, <존 오브 인터레스트> 등 훌륭한 필모를 쌓아가며, 어느새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배우로 자리잡았다. 우리는 그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녀에게는 연기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으니.
산드라 휠러는 응시한다. 차갑고도 깊은 시선으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듯. 하지만 무엇을 원하는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당신은 의식하지 않는 어느 순간에, 그 무심하고도 예리한 시선에 이미 사로잡혀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휠러는 대체로 무표정하다. 어쩌면 이다지도 무표정을 풍부하게 활용할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휠러가 지닌 현대적인 아우라의 상당 부분은 이 무표정에 기인한다. 그녀의 안면 근육은 활개 치지 않고 잠잠하다. 몹시도 극적인 표정을 구사하던 고전 배우와 비교하면 그녀는 정반대 편에 있다. 하지만 표현의 강도가 곧 연기력은 아니다. 정적인 눈과 굳게 다문 입술. 그 평온한 표면은 때로 슬픔으로 가득 차 있고, 때로 의기양양하며, 때로는 고독에 몸을 떠는 것이다.
산드라 휠러는 여왕 보다 황제라는 말에 더 어울린다. 그건 그녀의 감추기 어려운 카리스마에서 온다. 휠러는 언제나 위풍당당하다. 궁지에 몰렸을 때도(<추락의 해부>), 초라해진 아버지 앞에서 고심할 때도(<토니 에드만>), 심지어 동료를 사지에 몰아넣는 순간조차(<프로젝트 헤일메리>) 담담하게 스크린을 압도한다. 그렇다고 그녀가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나? 그렇지 않다. 물론 그녀는 자세가 곧고(송강호, 김윤석처럼 구부정한 자세를 트레이드마크로 가져가는 배우도 많음) 가벼워 보이는 잔동작을 절제한다. 하지만 그걸로 설명하기 어려운 아우라가 그녀의 연기에는 언제나 은은하게 배어 있다.
휠러는 무엇보다 트렌디하다. 그녀의 외모는 평범한 독일 여성에 가까워서, 얼핏 보아 트렌드와 무관해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연기는 매우 세련되었고 현대적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그녀의 무서운 점이다. 시대의 조류를 탄 것만큼 강력한 건 세상에 없다.
고전적인 할리우드의 여성 배우를 떠올려 보자. 여리고 사랑스러우며 감수성이 풍부한 그녀들을. 하지만 시대는 바뀌었고 2026년의 영화계는 강인하고 사려 깊으며, 무서운 에너지로 자기 세계를 장악하는 여성을 찾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여성 영화가 급격히 늘며, 원톱으로 작품을 이끄는 여성 배우가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조연급에서도 이전과 달리 강인한 여성 캐릭터가 늘었다. 휠러는 그러한 시대의 요구에 정확히 부합하는 배우다.
이런 분석은 자연스레 한국 영화계에 대한 생각으로 번진다. 지금 한국에는 트렌드에 맞는 여자 배우가 있나? 고민해 볼 시점이다. 특히 여성 배우들은 연기의 톤을 잡을 때, 이런 트렌드를 적극 고려할 만하다.
예를 들어 한국 영화계의 여신으로 군림하는 전도연의 경우를 보자. <밀양>(2007)에 출연할 때만 해도 그녀의 연기는 트렌디했다. 고통과 고난에 몸부림치는 여리고 섬세한 여성 말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그녀의 장기는 다소 올드하고 과장되게 느껴진다. 최근 김고은과 함께 출연한 <자백의 대가>에서도 전도연의 섬세함은 극에 달해 그 자체로 예술 작품 같았다. 하지만 정작 더 많이 회자된 것은 김고은의 직선적인 연기다. 물론 팬덤 차이도 있겠지만, 전도연으로 대표되는 연기의 결이 지금 시대가 소구 하는 캐릭터와 어긋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지금 한국에서 강인한 중년 여성에 가장 어울리는 배우는 염혜란이 아닐까 싶다. 그녀의 강인함은 동양권 문화에 맞춰져 있으므로, 서구의 그것과 느낌이 다르다. 기본적으로 모성에 기반하며(<폭싹 속았수다>, <더 글로리>, <내 이름은>) 훨씬 부드럽고 푸근하다. 동양에서 상상하는 강인한 중년 여성이란 그러하기 때문이다. 물론 강한 여성이 '어머니'에 한정돼 있는 점은 국내 작품의 한계이며, 확장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러한 캐릭터에 한해, 자식을 위해 지옥까지 달려가 맨손으로 악마도 때려잡을 어머니에 관해서라면, 지금 염혜란을 대체할 배우는 없어 보인다.
개인적으로 주목하는 배우는 이정은이다. 그녀 역시 중년 여성이지만, 염혜란에 비하면 '어머니' 보다 '직장인' 쪽에 가깝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희한하게도 엄마 이외의 역할을 많이 맡았다. <기생충>에서는 가족을 먹여 살리는 가장이었고, <우리들의 블루스>에서는 첫사랑을 간직한 여자, <하얀 차를 탄 여자>에서는 사건을 파헤치는 경찰이었다. 그녀의 힘은 자식을 향한 모성보다는 끝내 생존하려는 질긴 생명력에서 나온다. 이정은 역시 매우 절제되고도 세련된 연기를 구사하기 때문에 어쩌면 염혜란 보다 더 트렌디하다고 볼 수 있다. 적당한 역할만 주어진다면 한국을 대표하는 중년 배우로 올라설 것이다.
성장하는 아티스트를 보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다. 보통 이런 즐거움은 신인에 한정되는데, 최근에는 떠오르는 중년 여성 배우가 많다는 점이 새롭다. 산드라 휠러의 연기를 보고 싶다면 <토니 에드만>과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추천한다. <토니 에드만>은 무척 좋은 영화인데, 개봉 당시 국내에서 주목을 못 받았지만 지금 보아도 충분히 재밌을 것이다.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휠러의 비중이 다소 적다. 염혜란은 <도깨비>부터 시작해 눈도장을 찍은 작품이 워낙 많지만, 개인적으로 노희경의 <디어 마이 프렌즈>를 잊을 수 없다. 이정은의 경우 많이들 <기생충>을 떠올릴 텐데, <우리들의 블루스>의 자연스럽고 편안한 연기가 맘에 남는다.
※ 관련 글
- <토니 에드만>에 대한 해설.
꽤 자세한 해설을 두 편 올렸는데, 작품을 너무 해부하는 것 같아서 마지막은 생략하고 독자에게 맡겼다.
https://brunch.co.kr/@comeandplay/30
https://brunch.co.kr/@comeandplay/32
- 노희경 대사에 관한 글. <우리들의 블루스>에 관한 언급이 있다.
https://brunch.co.kr/@comeandplay/707
- <하얀 차를 탄 여자> 비평.
https://brunch.co.kr/@comeandplay/1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