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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Jul 23. 2018

고갈된 남자. <정우성 배우론>

※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 기고한 데일리 원고를 수정한 글입니다.


영화 <강철비>의 스틸컷


내가 정우성을 생각할 때에 머릿속에 종종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그가 오래전 한 광고에서 장쯔이를 향해 너 때문에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며 “가! 가란 말이야!”하고 소리 지르던 장면이 그것이다. 이 장면이 유독 인상 깊은 이유는 물론 화려한 캐스팅이나 독특한 설정 탓도 있겠으나, 눈에 눈물을 그득히 담고서 연인을 향해 악다구니를 쓰는 그 위태로운 얼굴이 기억에 남기 때문이다. 생각하자면 내게 정우성은 늘 그랬다. 싱긋 웃는 부드러운 미소는 더할 나위 없이 멋지지만, 이상하게도 정작 내게 깊이 각인되는 것은 지극히도 황폐한 그의 얼굴이었다. 저 광고에서 보인 피폐한 얼굴은 조금씩 결을 달리하며 그의 작품들을 은밀하게 횡단하는데, 이것이 배우 정우성을 설명하는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배우 정우성을 대중에게 알린 두 편의 영화, <비트>(1997)와 <태양은 없다>(1998)에서 그는 방황하는 아름다운 청춘을 연기한다. 그런 순간들이 있다. 연기자가 애를 써서 하나의 배역을 창조하였다기보다 자신과 꼭 맞는 역할과 운명적으로 만났다는 느낌을 주는 순간들. 여기서 젊은 시절의 정우성은 잘 맞는 옷을 한 벌 입은 듯 자연스럽고 강렬한 매력을 뿜어낸다. 그가 단숨에 스타덤에 오르며 아직까지도 청춘의 대명사로 거론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 운명적인 만남, 배우와 배역의 극적인 합일의 저변에 방황의 정서가 드리워져 있음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그 때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배우 정우성에게는 여전히 위태로운 남자의 초상이 어른거린다. <강철비>(2017)에서 북에서 온 최정예 요원을 연기할 때, 나는 처음으로 정우성의 연기에 놀라움을 느꼈다. 한 남자의 시신 위로 옷을 덮어줄 때, 지켜주고자 했던 이들로부터 총격을 당할 때 그는 슬픔의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공허한 눈빛을 하고 있다. 어쩌면 그 얼굴에 놀랐다는 말이 더 적당할지도 모르겠다. 멜로 영화를 찍을 때조차 정우성이 맡은 역할들은 자주 절박한 상황에 처한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에서는 기억을 잃어가는 연인의 모습을 지켜보아야 하며, <마담 뺑덕>(2014)에서는 자신을 파괴하는 여자의 곁을 떠나지 못한다. 그가 이런 배역들을 맡는 것에는 어딘가 애수 어린 마스크 탓도 있겠지만, 스크린 위에서 뿜어내는 정우성 특유의 절박한 느낌도 한몫을 하는 것 같다. 그는 <아수라>(2016)에서 다시 한번 수세에 몰린다. 도경(정우성)이 얼굴에 피철갑을 하고서 광포하게 차를 몰던 장면, 그리고 선모(주지훈)와 좁은 복도에서 대면하던 순간을 떠올려보자. 궁지에 몰리다 못하여 낭떠러지 앞에 선 바로 그 순간, 정우성의 연기는 어딘가 빛이 난다. 물론 <무사>(2001)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에서 긴 팔다리로 액션을 보여줄 때나, <감시자들>(2013)과 <더 킹>(2016)에서 악역을 연기할 때에도 그의 연기는 나쁘지 않다. 그러나 배우 정우성이 가장 돋보이는 순간은 역시나 피폐하고 황량한 내면의 남자를 연기할 때다.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조금 이색적인 영화는 아마 <똥개>(2003) 일 것이다. 그는 여기서 조금 거칠지만 순수한 촌뜨기 철민을 연기한다.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철민은 자신이 키우던 개를 판 학교 선배들과 싸우고서 차에서 울음을 터뜨린다. 이 장면에서 정우성의 연기는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한 느낌을 준다. 이 장면이 이질적인 이유는 그것이 슬픔을 다루되 병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철민은 아버지의 견고한 울타리 안에 있기에 위태롭지 않으며, 그의 행동은 방황보다 말썽에 가깝다. 그의 좌충우돌은 아프지만 회복을 담보하기에 건강하고 유머러스하다. 똑같이 슬픔을 연기하고 있음에도 그리 강력하지 않은 이 장면은, 도리어 우리에게 한가지 비밀을 알려준다.


배우 정우성이 빛나는 순간은 그가 단순히 슬픔을 연기할 때가 아니다. 제 옷을 입은 듯 자연스러웠던 <비트>와 <태양은 없다>, 배우로서 한 걸음 나아간 <아수라>와 <강철비>, 그리고 사못 이질적이었던 <똥개>의 연기를 떠올려보면 알 수 있다. 비극을 예감하면서도 달릴 수밖에 없을 때, 불가능인 줄 알면서도 삶의 희망을 찾아 허덕일 때 비로소 정우성의 연기는 반짝인다. 작품들 속의 배우 정우성은 방황하던 어린 시절을 거쳐서 삶의 갈증에 시달린 끝에 고갈된 상태에 이르렀다. 그것은 내게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간신히 몸을 퍼덕거리는 메마른 생선 한 마리를 연상시킨다. 고갈된 남자. 지금 배우 정우성이 지금 도달한 지점을 설명하는 단어는 그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난민에 대하여 꾸준한 관심을 보내는 그의 행보도 (그의 의견에 대한 동의 여부를 불문하고) 수긍되는 측면이 있다. 배우로서 데뷔한 이래 정우성은 갈 곳 없이 거리로 내몰린 자들의 감각을 자주, 온 몸으로 관통하여 왔으니 말이다.     


올해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의 프로그램 중 하나인 ‘스타, 배우, 아티스트 정우성’에서 그가 출연한 영화 12편을 상영했다. 생각해보면 정우성 만큼 비현실적인 느낌의 배우가 또 얼마나 있을까. 비현실적으로 수려한 외모로 현실의 바닥에서 건져낸 고통을 연기할 때, 양 극단을 견디는 그의 육체는 지극히 영화적이다. 종종 정우성이 연기하는 고갈된 인간의 모습이 그와 완전히 분리되어 새롭게 창조된 것인지 궁금해진다. 나는 오히려 정우성이 그가 지닌 고통의 감각을 남몰래 꺼내어 영화 안에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가 연기하는 인물들의 피폐함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는 누구도 끝내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방황하던 아름다운 얼굴이 인생의 황폐함을 담기까지, 배우 정우성은 아마도 자주 메마름을 삼켜야 했을 것이다. 아니, 이 표현이 더 정확한 것 같다. 그는 말라붙은 자리를 부지런히 찾아다녀야 했을 것이다. 그런 시간들이 쌓여 그는 이제 고갈된 인간의 감각을 자기만의 얼굴로 담아낼 줄 아는 배우가 되었다. 그 얼굴이, 그때의 연기가 배우 정우성의 인장처럼 느껴진다고 말해도 좋을까. 우리에게 익숙했던 그는 어느새 매력적인 배우가 되어 다시 한 번 우리를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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