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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Nov 11. 2018

마미손 - 전혀 다른 아티스트의 탄생


요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티스트는 마미손이다. 그는 바람직한 아티스트의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다. 창의적이고, 컨셉이 확실하며, 자기 신념을 밀고 나간다. 사람은 대부분 비슷하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협적이다. 우리가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변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오직 아티스트만이 타협하지 않고 괴상한 고집을 부린다. 그 고집은 아집으로 추락하거나 예술로 변모한다. 새로운 컨셉을 추구하는 마미손은 고집이 예술로 변모한 좋은 사례다.


 컨셉을 듣자마자 나는 마미손이 마음에 들었다. 몸이 하나라고 정체성이 하나일 필요는 없다. 만일 우리가 내 정체성은 여럿이라며 회사에서 눈 밑에 점을 붙였다 떼었다 하면 일상생활이 힘들어질 것이다. 그러나 아티스트는 다르다. 하나의 몸, 하나의 인격을 넘어서는 상상력은 특별하다. 물론 다양한 컨셉을 보여주는 아티스트도 있고(예를 들면 제이블랙, 제이핑크), 자신의 과거와 결별하는 예술가도 있다. 이런 작업도 흥미롭다. 그러나 예술가 A가 전혀 다른 인격의 B를 탄생시키는 작업은 새로운 쾌감을 선사한다. A와 B가 동시에 존재하면서도 동일성이 부정되고, 그래서 둘 사이에 대립도 가능하며(이미 마미손은 ㅁㄷㅋㄹㅇ은 서로를 디스하고 있음), 그래서 관객이 전달받는 쾌감도 달라진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아티스트를 매우 좋아하는 취향이다.  



개인적으로 비극적인 일화가 있었다. 지금은 종영한 <슈가맨2>에서 '엉뚱한 상상'을 불렀던 가수 지누를 초대한 적이 있다. 지누는 전신을 우주복(편의상 이렇게 부르겠음)으로 가린 '히치하이커'로 활동하고 있다는 말을 전했다. 히치하이커는 인종, 나이, 성별 모두를 뛰어넘는 새로운 아티스트다. 나는 그가 미국에서 요청한 인터뷰에서조차 말을 하지 않으며 컨셉을 유지했다는 사실에 눈을 반짝이며 입덕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방송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날 히치하이커는 '히치하이커'와 '지누'의 정체성 사이를 아슬하게 오갔다. 게다가 내가 제일 아쉽게 생각하는 부분은 프로그램이 히치하이커라는 아티스트를 대하는 태도였다. 물론 웃음을 자아내겠다는 의도인 것은 이해한다. 슈가맨2는 계속해서 이미 얼굴이 알려질 대로 알려진 지누가 우주복을 입고 다른 인격을 연기하는 것을 희화화하는 웃음을 자아냈고, 그도 이것을 적당히 받아주었다. 적어도 이 방송으로만 볼 때에 히치하이커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신념'보다는 하나의 '시도'에 가까운 듯했다. 나는 불안불안한 맘으로 제발 이 컨셉이 유지되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 히치하이커는 덥다며 우주복의 머리 부분을 훌렁 벗어서 얼굴을 공개해 주었다.



... 이것을 계기로 나는 약 30분 만에 입덕과 탈덕을 모두 겪는 신선한 경험을 했다. (고마워요 슈가맨2) 이것을 두고 옳다 그르다 평할 문제는 없다. 어떤 컨셉을 설정하느냐는 아티스트의 선택이다. 하지만 잠시나마 정체불명의 히치하이커를 좋아했던 사람에게 이것은 선물이 아니라 테러에 가깝다. 이제는 히치하이커의 팬이 되기보다, 때때로 우주복을 입는 지누를 응원하게 되겠지. (지누 화이팅)


그래 뭐 지나간 건 아무래도 좋다. 그런데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나는 요즘 마미손이 인터뷰했다는 기사만 보면 화들짝 놀란다. 그리고 마미손 얼굴 부분이 벗겨지면서 다른 얼굴이 나오는 상상에 불안해하며 인터뷰 영상을 누른다. 다행히 아직까지 그의 인터뷰는 괜찮은 것 같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픈 말은 이것이다. 전혀 다른 인격의 아티스트, (누군지 충분히 알겠지만) 전혀 다른 컨셉으로 우리를 찾아오는 아티스트가 늘어났으면 한다. 그리고 이런 다중인격 아티스트를 소비하는 문화계의 태도를 정돈할 필요가 있다. 컨셉놀이의 허점을 포착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새로운 아티스트에 환호하고픈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마술쇼가 벌어질 때 트릭을 찾는 사람도 있고, 마법이라 생각하며 즐기는 사람도 있듯이 말이다. 관객의 다양한 수용양상 자체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적어도 사회자가 마술을 부정하는 것은 반칙이다. 불가능을 믿고 소비하는 것은 관객인 우리에게 허락된 예술적 특권이다.


글을 쓰면서 마미손이 예능에 출연해도 재밌을 것 같다고 생각을 하다가도, 또 혼자 흠칫 놀라곤 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점차 이런 아티스트를 대하는 문화계의 태도가 하루가 다르게 성숙해지는 것 같다. 좋은 사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더 많이 기대하겠다. 상상을 초월하는 새로운 아티스트의 출현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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