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평창 올림픽에서 여자 컬링 팀만큼 깊은 사랑과 환호를 받은 팀도 없는 것 같다. 모든 선수들이 박수받아 마땅하나 팀 킴에 대한 환호는 국대를 향한 존중을 넘어 스타에 대한 열광에 다가선다.
팀 킴의 스토리가 가진 매력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들의 압도적인 실력, 찰떡같은 호흡, 연거푸 보여준 환상적인 스킬, 짜릿했던 일본전(역시 이겨야 제맛), 안경 선배(김은정)의 캐릭터성, 이미 유행어가 되어버린 외침들(영미~), 냉철한 경기 운영 뒤에 숨겨진 인간적인 매력들까지(소위 입덕 포인트). 어쩌면 이들의 인기는 당연한 것도 같다. 그런데 이들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에는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모두가 이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라고 추천할 정도로, 대중이 이미 이들의 여정을 잘 짜인 하나의 '스토리'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무엇이 이들의 경험을 스토리의 영역으로 이끄는가. 저 무수한 요소들 중에서도 끝내 그것을 완성하는 것은, 이들이 '지원이 척박한 나라의 비인기 종목을 스스로 개척해낸 자수성가형 인물'이라는 점이다.
쉽게 말하자면 헝그리 정신. 물론 동계 스포츠 대부분의 종목들은 진짜 돈이 없다면 계속하기 힘들다. 이때 '헝그리'는 이 스포츠들이 돈이 전혀 안 든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전폭적인 지원 하에서 체계적으로 육성된 타국의 선수들과의 비교 열위에서 오는 상대적 측면을 말한다. 대부분의 비인기 종목들은 늘 상대적인 결핍에 시달린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중에서도 여자 컬링 팀의 헝그리함은 유독 세간의 화제였다. 그것은 꽤 귀여운 이야기이기도 했다. 마늘이 유명한 작은 동네 의성에서, 동생과 친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방과 후 활동으로 컬링을 배운 이야기. 그런데 그 시골 소녀들이 지원 빵빵한 북유럽 강팀들을 차례로 격파한다. 이 이야기는 즉각적으로 어떤 뭉클한 감흥을 자아낸다. 이것은 가깝게는 김연아의 성공스토리에서도 찾을 수 있었고, 멀게는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에서도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등장한다.
만약 팀 킴이 조기교육을 받아가며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서 육성된 팀이라면 어떨까. 물론 우리는 그들에게 박수치겠지만 그것은 '승리한 선수'에게 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척박한 무관심을 이겨내고 홀로 노력하여 메달을 따 왔을 때, 그 박수는 '승리한 인간'에 대한 찬사로 격상된다. 지원은 고사하고 오히려 무수한 장애가 있었어야 하며, 단번의 얻은 것이 아니라 실패를 이기고 성취하여야 한다. 그때에 비로소 선수는 '영웅'으로, 스코어는 '승리'로 격상되며, 그들에 관한 뉴스는 '스토리'가 된다.
사실 이런 헝그리 정신과 가장 궁합이 잘 맞는 것은 스포츠다. 그것은 아마도 몸으로 부딪히는 스포츠가 '고진감래'의 의미를 그대로 육화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감내한 고통은 울끈거리는 몸의 형태로, 마침내 도달한 승리의 단 맛은 얼굴에 가득한 환희로 우리 앞에 도달한다. 때로는 몇 시간, 몇 년 간 훈련을 했다는 거대한 숫자보다 육체에 이미지 하나가 우리를 설득시키고, 번쩍이는 금메달보다 뺨 위의 눈물 하나가 정서를 전달한다. 그 매혹적인 스토리의 시각화는 거부하기 힘들다. 그 때문인가, 우리는 매번 스포츠 선수의 역경 극복 스토리에 매혹된다.
앞서 헝그리가 있어야 뉴스가 스토리로 격상된다는 이야기를 하였는데, 이런 원리는 팬의 차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나의 영웅이 넘치는 지원이 아닌 넘치는 멸시를 받았을 때, 같은 성적을 낸 선수라도 그 팬들은 훨씬 열성적으로 변한다. 비로소 그것은 '선수에 대한 응원'에서 '인간에 대한 지지'로 승격되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꽤나 보편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영웅 중에서도 왜 하필 '이순신'이 가장 문화적으로 많이 소비될까. 왜 그의 생애는 '스토리'로 읽히는가. 그것은 아마도 그의 비극적 죽음 때문일 것이다. 본디 영웅은 '행복감'보다 '비애감'과 잘 조응하는 법이다. 그런 비극성이야말로 영웅 서사의 화룡점정이 된다.
스포츠 선수의 헝그리 정신을 극도로 밀고 나가면 '못 사는 나라의 스포츠 영웅'에 대한 서사에 도달한다. 우리나라도 한참 이런 이야기에 집착적으로 도취되던 시절이 있었다. 과거 권투와 레슬링이 인기를 있었을 때, 그리고 깡마른 체구의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 금메달을 땄을 때까지만 해도 한국은 대개 이런 서사 위주로 그들을 소비했다. 요즘은 국뽕이나 개인을 혹사하는 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보편적으로 공유되어서 그런지, 이런 식의 시선이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런데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선수에게 '몸이 부서져도 이겨라'는 식의 시선을 보내던 시절도 있었다.
나는 이런 '헝그리 한 스포츠 영웅'의 서사가 현실로 발현된 최고의 예는 복싱 선수 파퀴아오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가 얼마나 위대한 선수인지 속속들이 알지는 못하고 평범한 대중으로서 그의 경기를 소비하는 편이다. 그런데 아마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은, 그의 모국이 파퀴아오를 소비하는 방식은 여타의 나라와 다르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에는 그가 워낙 탁월한 선수라는 점, 통 큰 기부 즐긴다는 점 등 여타의 스토리들이 개입을 한다. 그러나 그 열광의 본질에는 '나라는 아무런 도움이 되어주지 못했는데, 혼자서 모든 역경을 딛고 일어서서, 배부르고 등 따시게 운동한 외국 선수들(특히 서양인들)을 다 이기고, 우리나라의 위상을 높인다'는 매우 기본에 충실한 영웅 서사가 있다. 그리고 이 서사에 걸맞은 최고는 종목은 복싱이다. 이건 우리의 적을 눈 앞에서 말 그대로 때려눕힌다. 물론 이런 경향은 특정 국가의 성향은 아니고, 모든 인간이 품는 본능적인 서사에 대한 갈망이다.
그러므로 '토대와 지원이 부족했던 비인기 종목'의 성격을 가진 컬링의 여자 대표팀의 '스토리'에 우리가 환호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다. 그들의 척박함은 성공에는 장애가 될지 모르나, 스토리 형성에는 결정적인 요소로 작동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이것은 선수들의 노력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가 스토리로서 환영받는 이유에 대한 평가다.)
결국 헝그리함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열후함이 영웅의 아우라가 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