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에 대한 상찬을 익히 듣고 기대를 품고서 영화관을 찾아가며 한 가지 우려되는 점이 있었다. 영화를 보고서 역시나 이 점을 확인하고서 씁쓸한 생각이 들어 <벌새>에 대한 짧은 말을 남기려고 한다.
다른 나라도 그렇겠지만 특히 한국의 독립 영화에서 언제부터 느껴지는 한 가지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학대받는 소녀의 투명한 시선'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다. 특히 그 아이가 어리고 어여쁜 소녀인 경우에 이런 경향은 더욱 심해진다.
<벌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1994년이라는 어떤 투박한 시대를 소녀의 시선으로 쫓아간다. 그 시대에는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김일성이 사망했으며, 소녀에 대한 갖은 폭력이 일상으로 받아들여지던 시절이다. 그녀는 그 속에서 남자친구, 단짝, 어린 동생과의 관계맺음와 상실을 반복하며 자신의 시절을 살아간다.
그런데 문제는 사회적 차원에서도 또 개인의 차원에서도 격동기를 살아가는 그녀의 시선이 지나치게 맑다는 점이다. 나는 지금 그녀의 행동이 지나치게 수동적이라거나 그녀의 표정이 무표정하다는 점을 꼬집는 게 아니다. 문제는 그녀의 시선, 정확히는 그녀의 시선을 체화하는 영화와 카메라의 시선이다. 거기에는 마땅히 일어나야 할 어떤 감정의 파동과 부산물이 지나치게 깔끔하게 삭제돼 있다는 인상을 준다. 거기 더해 주변의 사건들을 투명하게 관조하는 그 소녀의 시선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가진 주체의 그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우리에게 전달하는데 그치는 어리고 해사한 관찰자의 자리에 머문다.
이 시선의 공백은 '소녀의 시선'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담고 있다. 같은 자리에 성숙한 성인을 가져다 놓는다고 가정한다면, 이 공백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전쟁통에서 살아남은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티끌하나 없는 뽀얀 얼굴을 하고있을 때 느껴지는 부자연스러움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런 부자연스러움조차도 어리고 어여쁘며 학대받는 소녀를 주체로 가져오는 순간 자주 이해받는 것 같다.
이것은 불순물 없이 해맑고 또렷한 소녀의 시선에 대한 통념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소녀의 시선은 그러하리라는, 혹은 그러해도 좋다는 통념. 그러나 그 통념은 잘못됐으며, 이것은 미성숙에 대한 존중이 아니다.
어린 여성 화자가 등장하는 영화가 제작됐다는 사실만으로 지지를 받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 그런 시기는 지났다고 생각한다. 어린 소녀의 시선에 대한 지나친 관대함이 여성 영화의 풍성한 성장을 저지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영화들에게 당부하자면, 소녀의 해사함 뒤에 숨어 시선의 얕음을 숨기려는 안일함은 없었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주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