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생각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홍수정 Apr 05. 2020

허우샤오시엔과 등단에 관한 기억

허우샤오시엔에 대해 처음 들었던 2015년 나는 그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감도 없었다. 그가 대만출신의 거장으로 1980년대 대만 뉴웨이브를 이끌며 무수한 걸작들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그 후에 알게됐다. 전에도 그의 작품에 대해 들어본 적은 있겠지만 기억에 남겨두지 않았다. 나는 단지 그해 개봉한 그의 영화 <자객 섭은낭>이 좋다는 말을 듣고서 '씨네21 영화평론상 공모'에 써낼 소재가 되지 않을까 하여 극장을 찾았다.


극장에서 처음 맞은 그의 영화에 대한 기억이 선명하다. 흑백 화면에 나타난 당나귀 두 마리와, 바람을 맞으며 어디론가를 바라보는 전통의상의 '서기(중국 여배우)'. 그 묘한 이미지는 시작부터 나를 데려다 어디로 멀리 떠나버렸는데, 생각하자면 그건 짓궂은 낚시질 같은 사술이 아니라 달의 중력과 같이 거대하고 포근한 인력이었던 것 같다.


영화가 끝난 후 스크립트가 오르고 관객들은 하나둘씩 빠져나갔다. 불이 꺼진 극장 안에서 나는 홀로 느끼는 은밀한 설렘을 즐기고 있었다. 적당히 열린 어둡고도 평온한 관객석에서, 아주 기분 좋은 산뜻함이 스쳐지나갔다. 영화를 모두 이해할 수는 없지만 내가 그의 비밀 한 자락을 엿본 것만은 분명하다는 맹랑한 생각을 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자객 섭은낭'은 영화관에서 내리고 VOD로도 출시되지 않았던 것 같다. 요즘은 영화가 내려가자마자 바로 vod로 접할 수 있지만, 그때는 얼마간의 시간차가 있어 어디서도 작품을 보지 못하는 붕 뜬 시기가 있었다.  

바로 그랬던 어느 날의 밤과 새벽에 나는 그 영화를 계속 생각했다. 그리고 침대에서 몸을 뒤척이며 나만의 해석과 망상들을 핸드폰 메모지에 적어 넣었다.


다시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자객 섭은낭'의 vod가 나왔다. 나는 어째서인지 한낮의 시간에 방의 블라인드를 내리고 적당한 빛이 들어오는 방 안에서 영화를 틀었다. 그리고 눈물을 쏟았던 기억이 난다. 너무 아름답고 아려서 그랬다. 영화를 만질 수도, 그 안에 들어갈 수도 없고 눈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가슴을 두드릴 정도로 슬펐다.


그리고 다음 해에 나는 '자객 섭은낭'에 대해 쓴 러브레터를 씨네21에 보냈다. 당시는 변호사시험을 준비할 때라 등단이 된다 해도 평론가 활동에 전념할 수 있을지 여부도 불투명했다. 누군가는 다음 해로 지원을 미루라고 했지만, 이미 태어난 글이니 제 자리로 떠나보낸다는 심정으로 부쳤다.

그리고 한참 어설픈 고백문으로 등단을 했으니, 나를 평론가의 길로 이끈 것은 온전히 허우샤오시엔의 영화가 가진 힘이다. 나는 사랑에 빠진 십대처럼 무모하고 무식했고 영화가 슬쩍 내비친 세계는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깊고 아득하며 아름다웠다.


그리고 요즘도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를 볼 때면 어김없이 눈물이 흐른다. 석양빛이 어슴푸레한 대만의 풍경과, 작은 동네와 낡은 자동차, 프레임 밖에서 들려오는 대화들과, 천천히 움직이는 카메라의 적당한 속도. 그 사무치는 아름다움을 온전히 언어화 할 수 있는 날이 필자로서 내가 성숙했다 말할 수 있는 날이 되리라 짐작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재능이라는 '생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