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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Jul 31. 2020

중2병 말고 대2병

그 무시무시하다는 중2병의 본질은 "세상아, 나도 이제 어린이가 아니다!"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5세는 그런 나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초딩 소리를 듣던 몸에서 제법 아이 티가 벗겨지고 (잘 봐주면) 어른의 모습도 언뜻 보이는 시기. 이때의 꼬마 어른들은 자신이 성년에 가까워졌다는 점에 심취한다. 부모나 세상에 대한 반항도 사실은 달콤한 것이다. 이제 너희들의 보호를 받던 아이에서 벗어나 의견을 대립할 정도의 어른이 됐다는 선전포고. 그 무렵의 인간들은 자신을 길러주던 것들에게 싸움을 거는 방식으로 예전과 달라진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우쭐해한다. 물론 이 모습은 그 시기를 벗어난 이들이 보기에 꽤 웃기기도 하고, 자신의 과거를 강제소환하는 탓에 괴롭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늘 어째서 중2병 말고 '대2병'이란 말은 없는지가 궁금했다. 막 대학에 입학해 삐약삐약 적응하던 시기를 살짝 지날 무렵에 찾아오는 그 병도 독하기가 중2병 만만치 않다. '중2병'이 유년기를 벗어나 성년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에 심취하는 병이라면 '대2병'은 드디어 완숙한 성인, 자유롭고 낭만적인 청년, 깨어있고 지성 있는 대학생이 되었음에 도취되는 병이다.


이 병에 걸린 이들이 보이는 흔한 증상 중 하나는 철학이나 심리학, 진화론 따위를 자주 입에 올리는 것이다. 그들이 그러는 이유는 (학문을 좋아하기 때문도 있겠지만 상당수는) 자신의 입에서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진화학적으로 보자면' 같은 말들이 나오는 사실이 흡족스럽기 때문이다.

여기 더해 적지 않은 수가 자신의 성적 매력에도 도취된다. 나는 여자니까 여자의 경우를 말해보자면, 내가 이렇게 하면 섹시해 보이고 저렇게 하면 상대를 반응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 고무되며 스스로가 팜므파탈이 된 것 같은 느낌도 살짝 들기 시작한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약간 부끄럽긴 하지만 사실 너네들이 몰라서 그렇지 마냥 어려보이던 내가 이제 성적 매력이 상당하다고? 또 이런 사실을 나만 알자니 아까워서 친구를 만나 고민을 빙자한 자랑도 시전해 본다.

증상이 더 심한 자들은 이제 자신이 연애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심취한다. 그 무렵 누군가와 헤어지고 나면 (솔직히 모든 이별이 막 슬프지는 않지만) 꼭 친구를 불러다 소주를 마시고 노래방에 가 슬픈 노래를 부르며 악을 쓰고, 인사불성이 되고야 만다. 물론 정말 전쟁 같은 사랑을 하는 청춘도 있겠지만, 사실 대부분의 사랑은 상투적이고 별 볼 일 없으며, 온갖 예술가놈들이 이미 빛나는 말로 선수를 쳐놔서 내가 달리 붙일 주석도 없다. 하지만 그래도 그 무렵 시시한 사랑이 끝날 때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사람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독서실에서 수험서에 줄을 치던 내가 이제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며 밤거리를 비틀대는 우수에 찬 청춘이 되었다는 사실이 만족스럽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니 'OO병'으로 부르는 그 증상들, 스스로에 대한 심취와 우쭐댐은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맞은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찾아오는 열병 같다. 누군가는 직장에 들어가, 누군가는 결혼하고 다시 열병을 앓을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예상치 못한 시기에 자신만의 인생기를 맞이하고서 어깨를 으쓱대겠지. 다만 모든 이들이 중2 쯤에 유년기를 벗어나고 대2 쯤에 성년기를 맞기 때문에, 이 시기에 발병자가 유독 많아 보이는 것일 게다. 가만히 떠올리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우리들의 어떤 순간을 되돌아보며. 그래도 중2가 귀엽고 대2가 싱그러운 시기라는 점은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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