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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Aug 16. 2020

속물스러운 평론가

평론가로 등단을 하고서 느 것은 여전히 우리나라에는 글에 대한 편견이 짙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대상화인데, 모든 대상화가 그렇듯 그것은 늘 얼마간의 '우상화'와 '하대'의 양면성을 동반한다.


먼저 문인에 대한 우상화.

글은 필자의 사고를 담고 있지만, 그것이 반드시 깊고 위대하리란 보장은 없다. 물론 글로 세상을 바꾸는 이들은 늘 있어왔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문인의 성정은 차라리 비뚤어지고 예민한 아이에 가깝다. 막 태어난 듯 보들보들한 살결로 세상을 감각하고 자신의 경험을 바닥까지 긁어 토해내는 것이 글을 쓰는 작업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글쟁이들은 깊고 성숙한 내면을 지녔다는 인식이 오래 이어져 다. 거기에는 아마 이런 편견이 마음에 들었던 문인들이 오해를 벗기는데 소극적이었던 까닭도 있었을 것이다.

정작 이렇게 말하는 나 편견로부터 자유로울 수없었는데 내가 생각하는 멋진 평론가들, 입에 담배를 물고 세상을 고뇌하며 촌철살인으로 풍운을 일으키는 예리한 비평가들과, 입에 과자를 물고 방에서 뒹굴거리며 으로 먼지를 일으키는 내 모습 간의 괴리를 생각할 때면 나는 잘못한 것 없이도 죄럼 고개를 떨구고는 했다.


반면 글에 대한 편견의 다른 모습은, 그것의 '경제적 가치에 대한 하대'이다. 글은 너무 신성한 것이라 경제적인 가치를 매길 수 없기 때문에 도리어 평가절하되어 버리는 이상한 역설. 이것은 감히 속물스레 돈을 따지는 문인에 대한 거부감으로도 연결된다.


내가 평론가가 되고 나서 가장 놀랐던 것 중 하나는 무급으로 글을 써달라는 곳이 이렇게나 많다는 점이었다. 글 한편 써주세요, 힘들어서 그런데 돈은 못드려요, 그래도 도와주는 겸 글 한 편 써주세요. 김삿갓처럼 돈 대신 술이라도 받아야하나. 하다못해 돈으로 기부를 받아도 조심스레 말을 꺼내는 것이 상식인데, 글기부에 대해서는 심성 없이 제의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아예 제안서에 고료를 명시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경우 고료를 물어보면 대부분은 없었는데, "고료 없는 대신 글을 매거진에 실어드려요!"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조용히 입에 과자를 물고 액션영화를 틀고는 다. (쏴! 쏴버려!) 정말 사정이 어려울 경우 무료로 글을 써달라는 제안은 충분히 할 수 있지만, 그런 제의는 어렵고도 정중하게 오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다.


개인적으로는 고료가 없는 청탁은 받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적은 비용이라도 받는 것과 무료 사이에는 차이가 있 때문이다. 아주 작은 고료와 무료 사이에는 몇 푼의 차원을 넘는 차이들이 있는데, 필진으로서의 자존감과 글에 대한 존중이 그것이다.


그러나 가 무료글을 안쓰는 가장 큰 이유는 나의 관용이 누군가의 지위낮추고 생계를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등단한 글쟁이가 '감사합니다'란 말 듣고 글을 쓰기 시작하면, 등단하지 않은 이들은 되려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사정하듯 글을 쓰게 된다. 실제로 내가 아는 생은 잡지사에 글을 보내며 아마추어의 글을 실어주는 것이니 앞으로 잘하라는 거드름 섞인 말 들었는데, 이런 시장을 만든 것에는 고료를 개인의 차원에서만 보고 선심쓰듯 포기해버린 이들의 책임도 크다. 담이지만 나는 고료에 대해 쉬쉬하는 필자들에 대한 거부감도 큰데, '왜 비평은 죽어버렸나'를 기 전에 비평가가 직업인으로서 살아남는데 무슨 기여를 했는지를 자문했으면 한다.


글재주가 내면의 성숙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니 글쟁이가 이유없는 존경을 받을 필요도 없으며, 글을 쓴다고 별나라에 사는게 아니니 돈 앞에서 부끄럼을 탈 필요도 없다. 글쟁이에 대한 과대평가와 글에 대한 과소평가 모두가 싫어서 나는 그냥 둘 다 내려놓고 속물스러운 평론가가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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