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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Sep 06. 2020

못 할 것을 알면서도 무대위로

글쓰기의 부끄러움

처음 대학에 입학해 친구들과 PC방에서 '수강신청'이라는 것을 했을때, 나는 수강신청의 치열함에 대한 면역이 전혀 없었다. 나는 첫 클릭부터 실패하고서 바라던 수업에 주루룩 튕겨나가 장히 전사했는데 그게 무슨 상황인지도 몰랐다. 당시 나는 PC방에서 새내기들을 굽어살피던 과선배에게 해맑게 이게 무슨 상황인지 물었고 그 선배는 친절한 미소를 띄며 "망한 상황"이라고 알려줬다.


덕분에 나는 첫 학기 시간표를 기피 수업들로 꽉꽉 채우게 됐다. 게 중에는 악평이 무색할 정도의  명강의도 있었고, 과연 명불허전이군 싶은 강의도 있었다.

당시 교양필수였던 '글쓰기' 수업에서 힘들기로 유명한 A 교수님의 수업을 신청하기 위해 학과 사무실을 찾았다. 그때 내 신청서를 본 조교님이 복화술로 '이 수업 들을거에요? 내년에 다른 수업 들어도 되는데...'라고 은밀하게 말을 걸어왔는데, 나는 그분의 큰 뜻을 모른 채 "엥 왜요? 이 수업 다 찼어요? 그럼 신청 못하는 건가요!!"하고 큰 소리로 되묻는 배은망덕함을 보였다. 주변의 이목이 집중되자 조교님은 "아니아니, 들을 수 있어요. 굿럭^^" 하며 얼른 신청서를 받았고, 그렇게 나는 은인을 알아 못한 채 사무실을 나왔다.


그 글쓰기 수업은 연극, 뮤지컬 등을 과제로 내줬기 때문에, 나는 반아이들과 함께 얼기설기 각본을 쓰고(우리는 문창과가 아니라 자연과학부였다) 어설픈 연습을 하고서 무대에 올랐다. 같은 과 동기들까지 초대해서 선보인 연극은 아주 나쁘지는 않았지만, 나의 '쿨한 여자로 보이고 싶어' 자아를 후드려 패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부끄러웠다. 그때 무대 위에서 더듬더듬 대사를 읊던 기억은, 초등학교 시절 단상 위에서 발표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 눈알을 굴리며 멍하게 서 있던 기억과 함께 나란히 '부끄러우니 기억에서 지울 것' 리스트에 올랐다.


그렇게 봉인 기억을 다시 꺼낸 이유는 글쓰기에 대한 고백을 하기 위해서다. 아무리 읽히지 않는 글이라 한들 공개적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매번 나의 글빨을 세상을 향해 까발리는 일인데, 그 수치의 단상과 무대 위로 오르는 일에 비견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퍼포먼스는 때로 만족스러우나 자주 실망스럽다. 또 내 글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도 파도치듯 변화무쌍해서, 하루는 너무 좋다가도 그 다음 날이면 모조리 지우고 싶을 정도의 혐오감에 시달리게 된다.


어쩔 수 없는 것을 알고 있다. 아무리 싫은들 매번 부족한 글을 토해내며 이 순간을 관통하지 않으면 영원히 성장할 수 없고, '혼자 몰래 연습하다가 실력이 늘면 그때 써야지'라는 생각으로 살다가는 아무것도 못쓰게 된다. 또 지금 너무 부족하다 싶은 글이 나중에 보았을 때 꽤 신선하고 괜찮은 경우도 있기 마련이다.


는 완벽한 공연을 펼치는 아티스트를 꿈꾸지만, 사실은 매번 불안하고 부족한 상태로 무대에 오르는 광대에 가깝다. 이 괴로운 운명을 받아들이고 순순히 글을 쓰다가도, 한 번씩 자괴감이 쓰나미처럼 발작적으로 몰려오고는 한다. 역시 내 글은 너무 부족해. 언제쯤 부끄러움 없이 글을 쓸 수 있을까.


그러니 글을 쓴다는 것은, 또 내가 쓴 글을 본다는 것은 자만과 자괴와 자기애로 촘촘하게 엮은 수레를 굴리는 일과 같다. 오늘은 만족하고 내일은 실망하게 되는 묵직한 수레바퀴. 그 수레를 매일 굴리는 것 밖에 내게 다른 선택지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깨질 것을 알면서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다시 한 번 호흡을 깊이 하고 초라한 복장을 가다듬고서, 무대 위 따가운 조명 속으로 걸어들어가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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