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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Oct 02. 2020

발작성 글 염려증


찰리 카우프만이 각본을 쓴 <어댑테이션>(2003)는 극작가의 고충이 잘 나와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찰리 카프만'은 끊임없이 좋은 작품을 써야된다는 히스테리에 시달린다. 그가 글에 대한 고민을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며 홀로 이런저런 말들을 중얼거리는 장면을 보고서 나는 몸에 소름이 오소소 아났다. 아아 저 상황은 내가 잘알지. 


더 좋은 글을 써야되는데. 뭘 소재로 쓰면 좋을까. 일단 몸풀기 용으로 가벼운 글을 하나 쓸까. 아니야 그러다 가벼운 글밖에 쓸 줄 모르는 몸뚱이가 되면 어떻게 해? 각 잡고 빡센 글을 하나 써보자. 생각도 깊이 담고, 여태 안쓰던 문체도 써봐야겠지. 그러려면 책도 더 읽고 공부도 더 해야되지 않을까? 지금 당장 좋은 글이 나올것 같지는 않은데. 잠깐, 최근에 누가 좋은 글 하나 썼다고 하지 않았나? 일단 그 글 좀 볼까 ... 이런 잘썼네. 내 글도 좋아보이려나? 처음 등단했을 때보다는 나아졌어야 되는데. 아 이러지말고 일단 뭐라도 좀 써보자. 뭘쓰지, 에세이? 영화 비평? 그런데 지금 몇시더라.


이런 상황이 과장이 아니라면 믿으려나. 글에 대한 염려증과 거기서 뻗어나온 무성한 나뭇가지 같은 고민들은 머리 한켠을 차지하고 있다. 꽤 맘에 드는 글을 한 편 쓰면 증상이 잠시 나아지기는 한다. 한 2주 정도? 그러다 다시 스물스물 불안감이 올라오지. 나아지는 듯하면 다시 올라왔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그 지긋지긋한 좁쌀 여드름처럼.


그리고 이런 불안은 한 번씩 발작적으로 터져나오고는 한다. 작성 글 염려증 정도로 표현하면 되려나. 루랄라 티비를 보는 어느 편안한 날에 으어어억 나 글! 글 어떻게하지! 하지만 또 글이란 게 가려운 등 긁듯이 한 번 맘먹고 손 뻗는다고 금새 해결될 일도 아니고. 그저 호흡을 가다듬고 석탑에 돌 하나 올려놓고 합장하는 마음으로 작은 글 한 편 토도독 쓰는 것 밖에 달리 할 수 있는 건 없다. 론 그렇게 쓴 글은 어제와 크게 다를 바가 없. 그냥 이것밖에 할 수 있는게 없으니까 하는거야, 그냥.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은영그랬다. "피할 수 없으면 어쩌겠어. 그냥 당해야지."

그 날이 오긴 올런지 알 수가 없구나. 내가 만족스러운 글을 수시로 쭉쭉 뽑아낼 그 날. 어쨌든 불확실한 그 때가 올 때까지 나는 이 요란한 증상을 다독이며 동행해야 될 것 같다. 그래 피할 수 없. 어쩌겠어, 그냥 당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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