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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Aug 30. 2020

진실을 맨손으로 쓰다듬는 법, <조디악>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것부터 말하고 시작하겠다. <조디악>은 거리(distance)의 영화다.

영화의 내용은 간단하다. 스스로를 '조디악 킬러'라고 부르는 연쇄살인범은 살인을 저지른 후 언론사에 암호문을 보내고, 수사기관과 언론사의 협공에도 범인은 잡히지 않는다. 결국 한 언론사 삽화가인 '그레이스미스(제이크 질렌할)'는 가장 유력한 범인 쫓으며 그 이야기를 책으로 남긴다.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스토리다.


그러나 <조디악>은 <살인의 추억>은 물론 여타의 범죄물과 확연히 다른 구석이 있다. 영화는 '거리', 그러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그 물리적 공간으로부터 눈을 떼지 못한다. 영화 초반에 한 커플이 살해당하던 장면을 떠올려보자. 깜깜한 밤, 한적한 공터에 주차된 차 안에서 커플이 데이트를 즐기고 있다. 그리고 한 대의 검은 차가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가 싶더니, 멀어진다. 아찔한 것은 다음 순간이다. 멀어졌던 그 차가 다시 커플을 향해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그 차는 커플의 차 바로 뒤에 정차한다. 이 장면의 긴장감은 좁아지다, 멀어지고, 다시 좁아지는 그 거리감의 조용한 역동성에 있다.  

다른 살인장면도 마찬가지다. 호수에 있던 여자는 살인범이 천천히 다가오는 순간을 시시각각 느끼며 "웬 남자가 우리를 향해 다가온다"고 말한다. 또 택시기사가 살해되던 장면에서 카메라는 하늘 멀리서 택시를 찍다가, 점점 택시를 향해 가까워진다. 마침내 카메라가 택시 안에 들어와 기사의 곁에 안착했을 때 그는 살해당한다.

사냥꾼과 사냥감 사이와 거리. 우리의 몸 속에 숨겨진 위험 신호를 켜게 만드는 본능적인 거리. <조디악>은 바로 그 거리에 주목한다. 어쩌면 폴(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레이스미스에게 자꾸만 짜증을 내며 "나에게서 떨어져라"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이 영화에서 거리를 좁히는 것은 상대를 포착하는 것이며, 나의 레이더에 담는 것이다.


수사물이 '거리'를 다룬다면 통상은 '형사와 범죄자' 사이의 거리에 주목할 것이다. 하지만 <조디악>은 좀 다른 길을 간다. 영화는 처음 살인범과 피해자들 사이의 거리를 보여준다. 좁아지면 살해당하는 그 섬뜩한 거리. 그리고는 형사들이 유력 용의자인 '리(존 캐럴 린치)'를 향해 다가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하지만 수사는 실패하고, 하염없이 시간이 흐른다. 이때 돌연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삽화가, 그레이스미스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는 마치 이어달리기의 바톤을 넘겨받은 주자처럼 용의자를 추격하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가 영화가 정말 보여주고 싶었던 부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는 리의 주변인들을 하나하나 찾아가며, 그의 지인들을 징검다리 삼아 조금씩 살인범에게 가까워진다. 때로는 너무 가까워지는 순간도 있다. 목숨의 위협을 느낀 그는 때로 달아난다. 그러니까 (그의 활동을 책을 쓰기 위한 것으로 본다면) 작가-살인범 사이의 바람직한 거리는 형사의 경우와 다른 것이다. 형사와 살인범의 거리는 한없이 가까울수록 좋을 수 있다. 그러나 작가는 살인범과의 적정한 거리를 따로 찾아야 한다. 진실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깝고,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을 정도로 먼 거리를.


영화의 말미에 결정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우연히 상점에 들른 그레이스미스는 리와 마주친다. 공격을 받기에는 다소 멀고, 그를 알아보기에는 충분히 가까운 거리에서. '적절하다'고 부를 수 있는 그 거리에서 리를 바라본 뒤 그레이스미스는 돌아선다. 이 하나의 순간을 위해, 살인범을 바라보는 작가의 가장 적절한 거리를 찾기 위해 그는 여태 그다지도 오랜 시간을 헤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순간의 도래는 서사의 측면에서 우연적이지만 영화의 측면에서 필연적이다. 거리의 영화라고 할 만한 순간이다.


그런데 사실 내가 정말 하고싶은 말은 이제부터다. <조디악>을 보는 내내 나는 어딘가 불쾌하고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처음 살인사건이 벌어졌을 때, 경찰은 살인사건의 피해자들을 플래쉬로 찬찬히 살펴본다. 그 바로 다음 장면에서, 그레이스미스는 어린 아들을 정성껏 돌보며 등교준비를 시킨다. 칫솔질을 돕고, 안아주고, 대화를 나누는 아버지의 애정어린 손길. 최악의 살인장면 뒤에 부자의 다정한 아침이 이어지는 것이다. 이 두 장면은 너무 다른 온도를 지녔음에도, 너무 가까이 붙어있어서 불쾌감을 자아낸다.

더 이상한 순간도 있다. 티비를 켜자 뉴스에서는, 스쿨버스의 아이들을 죽이겠다는 살인예고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그레이스미스는 아들이 곁에 다가오자 화들짝 놀라며 뉴스를 끈다. 그런데 이때 아들이 그레이스미스를 향해 다가가는 순간의 연출은 마치 범죄자, 혹은 사냥꾼이 표적을 향해 다가가는 장면처럼 으스스하게 연출된다. 뿐만 아니라 그레이스미스의 아내도 마치 살인범처럼 어두운 밤에 느닷없이 집에서 나타난다.


어째서 이 영화는 그레이스미스의 '가족'들과 '살인사건'의 이미지를 이다지도 가깝게 접붙여 놓는걸까. 그런 의문이 생길 무렵, 계속해서 아들의 안위를 걱정하고 화난 아내를 달래는 그레이스미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그의 모습은 한 남자가 자신의 가족을 챙기는 모습 그대로다. 그리고 그 모습은 그가 살인사건에 속에 놓인 진실의 윤곽을 더듬는 정성어린 모습과 오버랩된다. 그것은 형사가 용의자를 쫓을 때와도 다르고 기자가 특종을 찾을 때와도 다르다. 어린 아이를 보살피듯 세심하고도 걱정스러운 태도. 하나의 비극적인 사건이자 자신이 기록하는 작품의 주인공들을 대하는 작가의 자세. <조디악>에서 내가 본 것은 겁 먹은 스스로를 끊임없이 다독이며, 마치 어린 아들을 씻기듯 맨 손으로 정성스레 사건을 쓰다듬어 진실을 찾아가는 작가의 모습이다. 그의 태도가 묵직한 감동을 건네고 <조디악>을 특별하게 만든다.  


영화의 마지막 순간, 살인사건의 살아남은 피해자에게 용의자로 추정되는 자들의 사진이 주어진다. 피해자는 그 중에서도 리의 사진을 짚으며 그를 용의자로 지목한다. 실화에 따르면 그 뒤에도 여러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영화는 이 순간에서 멈춘다. 영화가 생각하는 범인의 얼굴이 마침내 드러난 순간이다. 그리고 이 순간은 그레이스미스가 연필로 정성스레 그린 용의자의 몽타주가, 그가 아이를 돌보듯 진실을 더듬어 완성한 책이, 한 조각의 실사가 되어 우리에게 돌아온 순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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