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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Jul 17. 2021

<블랙 위도우>에 훈련 장면이 적은 이유는 뭘까

놓치지 말아야 할 영화 속 포인트

※ 스포일러가 있어요


<블랙 위도우> 스틸컷

<블랙 위도우>를 보고 재미있는 포인트를 정리해 보았다.


이 영화의 명장면, '레드룸 시퀀스'

<블랙 위도우>를 보고 가장 놀랐던 것은 어린 나타샤 로마노프가 레드룸에 갇힌 뒤 등장하는 시퀀스이다. 나타샤가 레드룸에 갇히고, 어린 아이들이 학대에 가까운 훈련을 받고, 전세계에 전운이 감돌고 있음을 보여주는 짧은 시퀀스. 편의상 이 장면을 '레드룸 시퀀스'라고 부르겠다. 

이 장면은 매우 강렬하고 감각적이다.  


우리가 평온하고 행복한 기억을 떠올릴 때, 그 기억은 머릿속에서 한 편의 장대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반대로 괴로운 기억들은 머릿속에서 날카롭게 조각난 파편처럼 제 멋대로 튀어 오르고는 한다. 


나타샤에게 레드룸에 갇힌 시절은 후자에 까울 것이다. 암울한 시대상과 개인적 불행으로 얼룩진 시절. (물론 후반부에 가서 그 시절에 대한 인상이 달라지지만 말이다)


레드룸 시퀀스는 그 시절에 대한 나타샤의 인상을 반영하고 있다. 그녀가 그 시절을 어떻게 인식하고, 기억하는지. 그러면서도 마냥 무거워지지 않고 감각적인 편집과 리드미컬한 속도감을 통해 마블만의 경쾌함을 놓치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 영화는 <블랙 위도우>의 색깔을 우리에게 확실하게 전달한다. 

이 영화는 다소 괴로울 수 있는 나타샤의 어린 시절을 들여다보는, 진지하면서도 리드미컬한 작품이라는 점을 말이다.


<블랙 위도우> 스틸컷

나타샤의 '트레이닝 장면'이 적은 것에 대한 생각

<블랙 위도우>를 보고 많은 관객들이 어린 시절 나타샤가 훈련받는 장면이 적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 같다. 물론 그 부분이 아쉽기도 하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내 마음대로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이 이야기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블랙 위도우>는 나타샤 로마노프가 히어로가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 과정이 다른 어벤저스들과 좀 다른 지점이 있다.


블랙 위도우는 신도, 과학자도 아니고, 헐크처럼 신체 능력이 탈인간의 수준으로 뛰어난 것도 아니다. 그녀는 잔혹한 인간실험에 의해 배양된다. 그 과정은 사실상 훈련이라기보다 학대에 가깝다. 


레드룸은 그녀를 성장시켰지만, 동시에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안겼다.

'블랙 위도우'라는 히어로는 상처 속에서 탄생했다.


물론 <어린 시절의 고난 → 고난 극복을 위한 트레이닝 → 히어로 탄생>은 히어로물의 흔하디 흔한 프레임이다. 그래서 그녀의 어두운 과거가 놀랍지는 않다. 하지만 블랙 위도우의 경우에는, 트레이닝 과정 자체가 상처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보통 히어로 무비에서 트레이닝 과정은 관객에게 짜릿한 쾌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블랙 위도우의 트레이닝 장면에서 그런 쾌감을 선사하는 것은, 이 시기가 나타샤 로마노프에게 상처라는 설정을 생각할 때에 적절하지 않다. 그렇다고 학대에 가까운 트레이닝을 길게 나열해서 관객에게 괴로움을 주는 것도 이 영화의 톤에 비추어 적합하지 않다.


그래서 트레이닝 장면은 레드룸 시퀀스를 통해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바로 블랙 위도우의 이야기로 건너뛰는 선택이 이 영화의 톤을 생각했을 때 영리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나타샤 로마노프라는 인물에 대한 예의라고도 볼 수 있다.

 


강인한 여성들의 전쟁 혹은 연대

여성이 무리로 나오는 영화에서 상당수는, 서로 섹시함을 겨루거나 질투심에 사로잡혀 냥냥 펀치를 날리고는 한다. 그런 점에서 <블랙 위도우>에 강인한 여성들이 나와 시원한 전쟁을 벌이고 연대하는 점은 묘한 쾌감을 자아낸다. 아름다운 여성들이 그저 싸움에 집중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는 게 <블랙 위도우>의 또 하나의 매력이다.


이 영화는 히어로물 답지 않게 지금, 전세계에서 핫한 여성주의 이슈들을 매우 많이 녹아냈다. 특히 비겁하고 폭력적인 남자에 의해 여성들이 세뇌를 당한다는 설정은 최근 핫 키워드인 '가스라이팅'을 떠올리게 한다. 게다가 그 세뇌를 깨는 약이 '빛이 나는 가스', 즉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라는 건 분명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진지하게 페미니즘 이슈를 제기한다거나, 지지한다고 말하는 건 오버일 것 같다. 

<블랙 위도우>는 마블이 얼마나 영리하게 현시대의 이슈를 팔로우하면서 영화에 녹여내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맛깔나는 캐릭터, 배우들의 연기력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점이 이 영화의 캐릭터이다. 새롭지는 않지만 재미있다. 원래 아는 그 맛인데 맛집에서 만들어서 그런지 맛깔난다.


과거의 영광에 빠져있는 망상주의자이자, 딸들에 대한 애정을 투박하게 표현하는 마초남 아빠.

자애로우면서도 과감하며 집안의 실세인 엄마.

가족에 대한 원망과 애정,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첫째 딸.

투정이 많지만 장난스럽고 마음이 여린 둘째 딸. 


<작은 아씨들> 스틸컷. 막내 에이미 역할의 플로렌스 퓨

특히 둘째 딸 옐레나 역할의 '플로렌스 퓨'는 박찬욱이 만든 <리틀 드러머 걸>(2018)에 출연했을 때부터 주목한 배우이다.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도 아니고, 전형적인 미녀상도 아닌 것 같다. 그런데 특유의 건강미 넘치면서 장난기 많은 소녀의 느낌이 너무 매력적이라 계속 응원하고 있다. 이제는 응원한다고 말하기도 뭐할 정도로 커버렸지만..


스칼렛 요한슨은 원래도 이쁘다고 생각했는데, 이 영화의 외모는 비주얼 충격이다. 예전 니콜 키드먼의 전성기를 보고 느꼈던 충격이 떠올랐다. 레이첼 와이즈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에서도 그랬지만 잔혹한 역할이 꽤나 잘 어울린다. 큰 눈, 굳게 다문 입매가 야무지면서 표독스러운 인상을 풍기는 것 같다. 알렉세이 역할의 데이빗 하버는 원래 이렇게 코믹 연기를 잘했던가? 캐릭터도 찰떡같이 잘 어울려서 저런 게 이미지 캐스팅인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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