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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Sep 13. 2020

<이제 그만 끝낼까 해>의 아쉬운 마지막에 대하여

찰리 카우프만의 작품들을 돌아보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얼마전 넷플릭스가 공개한 <이제 그만 끝낼까 해>는 찰리 카우프만의 인장들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작품이다. 그가 각본을 쓴 <이터널 선샤인>(2004), <존 말코비치 되기>(1999)부터 연출까지 맡은 <시네도키, 뉴욕>(2007), <아노말리사>(2015)까지. 찰리 카우프만은 늘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슬그머니 지우고 양쪽을 배회하며, 주인공 인생을 닮은 작품을 영화안에 등장시키고, 제유법(부분을 통해 전체를 비유하는 수사법)을 반복해 사용하며 인생에 관해 탐구해왔다. 이런 기법들은 그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전제, '나는 곧 타인이고, 우리의 삶은 비슷한 양상으로 반복된다'는 테마를 완성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 주체들은 자주 개별성을 잃은 채 비슷한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그럼에도 세계는 무리없이 작동되고는 했다.


이것을 운명론적이라고 보아야 할까? 내 대답은 부정적이다. 운명론이 운명에 종속되는 개별 인간을 상정한다면, 찰리 카우프만은 그 개별성마저 삭제해버린다. 정교한 시계태엽이 움직이듯 인간도 세계의 부품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면 그만인 것이다. 다만 카우프만은 이 반복적인 굴레를 과거에는 로맨틱하거나(터널 선샤인) 장난스럽게(어댑테이션) 그렸다면, 근작에 이르러 다소 침울하거나(시네도키, 뉴욕) 좌절스럽게(아노말리사) 감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가장 최근작인 <이제 그만 끝내려고 해>를 감도는 것은 짙은 무력감이다. 전작들이 '반복적인 굴레'를 수용하되 맹렬하게 탐색해 왔다면, 이 작품은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그것을 멍하니 지켜보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제 그만 끝낼까 해>에는 놀라운 변화가 한가지 엿보인다. 여기에는 이 삶의 굴레를 끝낼 것을 결심하는 주체가 등장한다. 바로 여자(제시 버클리) 주인공이다. 그녀는 '지루한 남자친구'로 제유되는 반복적 일상의 사슬을 끊을 것을 결심한다. 또 집에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남자친구(제시 플레먼스)에게 계속 말한다. 하지만 일은 그녀의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그녀는 결국 남자친구와 이별하지도, 집에 돌아가지도 못한다.


그런데 이 결론은 그녀가 영화적 세계 안을 탐험하며 자연스레 도달한 결론이 아니다. 영화는 처음부터 하나의 결론을 향해 그녀를 잡아끌었다. 이것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연출이 있다. 그녀가 남자친구 부모님의 집에 도착했을 때 특이한 연출이 등장한다. 카메라는 두 남녀가 쇼파에 앉기도 전에 그곳을 미리 비추고, 전화벨이 울리기 전에 전화를 먼저 비춘다. 이러한 연출은 영화가 주인공들의 행동을 미리 알고있거나, 유도한다는 인상을 주며, 카우프만이 좋아하는 '마리오네뜨'를 연상시킨다. 그러니까 우리는 카우프만의 손을 볼 수는 없지만 그가 선보이는 인형극을 보고있는 셈이다. 또 그녀의 남자친구는 그녀가 다른 생각을 하려는 순간마다 새로운 화제를 꺼내는 식으로 그녀의 선택을 방해한다. '이제 그만 끝낼까 한다'는 소망과는 반대로, 영화는 그녀가 원하는 결말을 내어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 영화의 마지막이 더욱 실망스럽다. 마지막에 이르러 그녀는 남자의 무대를 바라보며 무대 밖에서 박수를 치고 있다. 이것이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다. '끝'을 생각하집에 돌아가길 원하던 그녀는 지금 무얼하고 있나. 물론 이 영화는 원작이 있고, 세간의 해석과 같이 그녀를 학교의 관리인 제이크가 머릿속에서 만들어 낸 상상의 인물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이 영화의 마지막이 지금과 달라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이 영화의 마지막이 이례적이라는 사실은 카우프만의 전작들을 살펴보면 더욱 뚜렷해진다. <존 말코비치 되기>가 끝없이 이어지는 숙명을 잔인하게 선언했다면 <이터널 선샤인>은 반복적인 인연을 낭만적으로 긍정한다. 또 <시네도키, 뉴욕>과 <아노말리사>는 그것에 담담히 패배를 선언한다. 어떤 방향으로든 카우프만의 주인공들은 반복되는 삶을 인식하고 그것에 질문을 던졌으며, 마지막에 이르러 자신만의 대답을 찾았다. <이제 그만 끝낼까 해>에는 이례적으로 굴레 바깥으로 시선을 던지는 여인이 등장하지만, 영화는 그녀에게 자신의 답을 찾을 기회를 주지않는다. 다짐은 공중에 흩어지고 그녀는 결국 무대밖에 남겨진다. 만일의 오해를 위해 말하자면, 나는 지금 그녀가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 못해서 화가 난 것이 아니다. 카우프만의 세계(반복의 굴레) 안에서 그녀가 새로이 제시한 의제(끝내고 싶어)가 망각된 채 버려지고, 영화가 여기에 어떠한 응답도 해주지 않은 것이 아쉽다는 말을 하고싶다. 이 결말에는 어떠한 태도나 고민이 담겨있지 않고, 그저 서사적인 종결만 있을 따름이다. 이렇게 카우프만의 세계는 새로운 미지의 지점으로 나아가는 대신, 어떤 쓸쓸한 전경을 그려내는 것에 그친다.  


<이제 그만 끝낼까 해>와 가장 유사한 DNA를 가진 작품은 <어댑테이션>(2002)인데, 카우프만의 알려지지 않은 명작이다. 여기서 카프만(니콜라스 케이지)과 수잔 올린(메릴 스트립)은 염증나는 일상에서 벗어나길 갈망하지만, 염원은 이뤄지지 않고 상황은 오히려 나빠진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르러 카프만은 결국 유의미한 도약을 이뤄낸다. 이 마지막이 얼마나 반짝이는지 <이제 그만 끝낼까 해>를 보며 다시금 깨닫는다. 그런 태도가 묻어나는 작품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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