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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Sep 21. 2020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에 대한 감상

영화화로 성취한 건 무엇인가

※스포일러 있음



종종 영화를 보며 이해가 잘 되지 않아 수첩에 생각을 정리할 때가 있다. 그럼 수첩을 보고 내용을 재구성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가 되고는 한다. 좋은 싸인은 아니다. 이야기의 복잡성을 떠나서, 영화가 전달하려는 인상, 감정, 서사 등이 하나의 다발로 직감적으로 와닿지 않는다는 의미다.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가 그랬다. 영화의 줄거리가 그다지 복잡하지 않음에도 무엇을 말하려는건지 전달되지 않아 나는 영화를 보며 종종 길을 잃고는 했다. 영화의 서사를 머리속으로 재구성하고 원작을 상상하며(아직 읽지는 않았다),   이 내용을 좋은 문체로 써내려갔다면 그 소설만큼은 필시 훌륭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씁쓸하게도.


얼마전 넷플릭스가 공개한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로버트 패틴슨, 톰 홀랜드 등의 출연으로 기대를 자아냈던 작품이다. 원작소설이 고딕 누아르의 걸작이라는 소문도 기대감을 자아내는데 한 몫을 했다. 그러나 영화를 보며 주로 느낀 것은 '이 작품이 영화화되며 성취한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의심이다.



영화는 베트남전쟁이 가까워진 1950년대 미국사회를 그렸다. 공권력은 부패하고, 종교는 타락했으며, 일상 어디에나 폭력이 접붙어 있다. 마을 사람들은 얼핏 신실한 교인들 같지만 실현 불가능한 욕망을 위해, 믿음있는 자를 착취하기 위해,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신에게 광적으로 매달린다. 이곳에서 십자가는 폭력과 맹신과 광기의 상징일 따름이다. 이 모든 것들이 뒤엉켜 끈적하게 혼재된 사회, 부도덕과 도덕이 결탁해버린 혼탁한 풍경을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환기시킨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작은 공동체를 통해 1950~60년대 미국을 환유한다. 명분과 이유를 알 수 없이 전쟁을 지속하며 매일 폭력을 마주해야 했던, 그것이 정상이라고 믿었던 광기의 시대를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영화가 원작에 내재된 예술적 잠재력을 '영화적'으로 되살리고 있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이 영화는 소설의 내용을 영상화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결정적인 몇 개의 장면이 있다. 연쇄살인마 부부가 희생자들의 사진을 찍는 장면, 마을의 목사가 뻔뻔하게도 자신의 성범죄를 설교의 소재로 삼는 장면, 아들과 아버지가 기도나무 아래에서 기도하는 장면. 이 장면들은 분명 영상의 힘을 드러낼 수 있는 순간임에도 별다를 것 없는 스릴러의 문법대로 연출되고 있다.


영화의 초반에 '어떤 악행과 비운으로 인해 이 마을 사람들 대부분 혈연관계였다'는 설명이 나온다. 이런 설정은 이 작은 도시에 안개처럼 뿌옇게, 벌레처럼 촘촘하고 기분나쁘게 채워진 폭력과 죽음의 공기를 비유하는 것일 게다. 이 분위기야말로 이 작품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몇몇 잔인한 장면과 자주 남용되는 음악을 제외하면, 영화에서 일상에 혼재된 죄악의 공기를 이미지화하기 위해 고심한 부분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아주 지루하거나 나쁜 연출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서사의 힘에 기대어 그럭저럭 진행되고는 있지만 이 영화에서 플롯 이상의 특별한 점을 찾아보기는 힘든 것 같다.

 


그간 <굿타임> <테넷> 등으로 필모를 착실히 쌓아가던 로버트 패틴슨, <스파이더맨> 이후로 정극연기도 가능함을 보여준 톰 홀랜드, 박찬욱의 <스토커>에서 인상을 남긴 미아 와시코브스카,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더들리 더즐리로 나왔다가 어느새 눈부신 성장을 보여주고 있는 해리 멜링 등 반가운 청춘스타들은 모두 꽤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다. 그래서 더 슬프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보며 얻은 소기의 성과는 원작소설에 대한 관심빌 스카스가드라는 배우를 접하게 된 점 정도인 것 같다. 영상이 텍스트를 손쉽게 이긴다고 믿는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은 사례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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