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명의 아티스트가 하나의 몸으로 선보이는 여러 정체성'에 대한 나의 지지는 이미 예전에 마미손에 대한 글(https://brunch.co.kr/@comeandplay/183)에서 밝혔다. 이제는 이런 현상이 '부캐'라는 용어로 통용되며 유행을 타는 것 같다. 멋진 일이다.
그런데 사실 이 부캐들이 본래 아티스트의 모습과 많이 다르지는 않다. <나혼자산다-여자들의 은밀한 파티>나 <놀면뭐하니-환불원정대>에 부캐들이 등장하는데, 가만히 뜯어보면 대부분 아티스트의 자장 안에 있음을 알게 된다. 이효리나 박나래 등은 이미 방송에서 무수한 컨셉 변신을 보여줬으니, 기시감이 느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궁금해진다. 본캐를 크게 벗어나지 않음에도 그들이 매번 '부캐'를 들고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째서 이 뻔한 놀이를 두 팔 벌려 기꺼이 환영하는가. 그저 유행이기 때문에? 혹은 단순히 설정놀이가 재밌어서? 그러니까, 지금 컨텐츠 시장을 달구는 '부캐'의 매력은 무엇일까.
연예인들의 '컨셉 변화'과 비교하며 그 답을 더듬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지금의 예능들이 보여주는 부캐는 연예인들의 컨셉 변화와 큰 차이가 없어보인다. 하지만 새 컨셉과 부캐 사이의 차이는 '히스토리'에 있다. 그러니까 이효리가 '쎈 언니의 컨셉'으로 예능에 나오는 것과 '환불원정대 천옥'으로 나오는 것의 차이는, 그녀에게 이효리의 히스토리를 물을 수 있느냐는 것에 있다. 전자가 아티스트 이효리의 히스토리 위에서 스스로를 설명해야 되는 반면, 후자는 "이효리가 누군데요?"하고 쿨하게 무시해도 설정상 문제될 게 없는 것이다.
'히스토리와의 단절'은 부캐의 핵심이다. 이것은 아티스트에게 자신의 과거와 결별하고 전혀 다른 시도를 할 자유를 선사한다. 때로 아티스트가 보여주고 싶은 다양한 매력은 그가 지닌 히스토리에 갇혀버린다. 새롭고 낯선 컨셉은 여지껏 쌓아둔 익숙한 컨셉에 먹힌다. 히스토리는 연예인의 힘이지만 그를 고착화하고 새로운 시도를 저지한다. 익숙한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토대 위에서 시작할 수 있을까? 부캐는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니까 '부캐'의 진짜 힘은 새로운 컨셉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익숙했던 것들을 지울 수 있다는 데 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너무 많이 아는 시대에 살고 있다. 개인에 대해 너무 많은 정보가 노출되고 그것들은 지워지지도 않은 채 빼곡히 기록된다. 히스토리가 형벌처럼 새겨지는 시대다. 연예인의 경우는 더욱 심할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대개 하나의 캐릭터로 분류되고, 분류는 곧 편견으로 굳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부캐는 연예인에게 새로운 자아를 꺼낼 수 있는 용기를 주고, 대중이 그를 새로운 눈으로 보는 계기가 된다. 그러니 부캐의 열풍은 정보의 단절, 히스토리의 삭제를 욕망하는 지금의 시대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부캐가 만능키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새로 창조되어 자유로운 만큼 위태로우며, 자주 본캐와 혼동되고 금새 지루해진다. 하지만 적어도 당분간은 이 뻔뻔한 놀이가 지속되기를 바라겠다. 새로운 이름들이 새로운 활기를 가져올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