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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Dec 09. 2020

기억과 영상으로 빚은 시간의 세계, <작은 빛>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시간이 선형적으로 흘러가지 않음을, 때로는 나선형으로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고, 또 때로는 한 곳에 우물물처럼 오래 고여있음을 많은 작품들은 우리에게 강변해왔다. 그리고 여기 <작은 빛>(2020)이 그려내는 시간의 모습이 있다. 가로 세로의 실들로 얽어진 스웨터의 결처럼, 과거에서 온 기억과 현재의 순간들이 교차하며 그렇게 오늘 하루가 채워져간다. 기억으로 과거를 소환하고, 영상으로 과거를 꺼내보고, 그걸 함께 추억하는 지금 이 순간 마주 본 얼굴들이 한데 모여 오늘 하루를 직조하는 것이다. <작은 빛>은 우리 삶을 구성하는 기억과 시간에 대한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영화다. 그것이 그리는 풍경을 온 몸으로 감각하는 것이 이 영화를 대하는 바람직한 자세라 할 것이다.



처음 영화가 시작하면 하나의 가족이 등장한다. 곧 뇌수술을 앞두고 있는 진무(곽진무)와 그의 엄마 숙녀(변중희), 그리고 그의 누나 곽현(김현)이다.

누나는 엄마와 걸어가며 옛날 이야기를 한다. 엄마가 (아마도) 진무를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목욕탕에 데리고 다녔다며, 이것이 요즘으로 치면 아동학대라는 우스갯소리를 흘린다. 그녀의 말에 엄마는 '그 때는 그렇게 생각없이 살았다'고 대답한다. 그저 지나가는 농담이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장면들을 생각할 때 이 대화는 예사롭지 않다. 그 말들은 시간을 사이에 둔 과거와 현재의 타협할 수 없는 간극을 지시하는 것 같다. 현재는 과거를 이해하지 못하고, 과거는 현재를 예상하지 못한다.  


그러나 평온한 하루 중에도 과거의 순간들은 예기치 않게 튀어오르고는 한다. 실수로 카메라에 너무 가까이 잡혀버린 벽면처럼, 형광등을 켰다 끄는 사이 등장하는 가족들의 모습처럼 우리 일상의 조각들은 부서져버린 파편처럼 시간 속을 떠돌다 어느날 돌연 우리 앞에 도착한다.



<작은 빛>에서 과거의 편린을 소환해내는 것은 주로 '개인의 기억'과 '캠코더에 찍히 영상'이다. 아들이 가족을 찍은 영상들은 어느새 현재에 도착한 과거의 조각이 된다. 가족들은 아들과 함께 영상을 돌아보며 즐거워한다. 이들은 대체로 영상이 찍히던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고 다른 세계를 보듯 영상을 감상한다. 이것은 과거에 경험한 세계, 캠코더 속에 찍힌 세계, 오늘 현재의 세계까지 이 모든 순간들이 하나의 연장선에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층위 안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 같다.


진무는 엄마를 흔들어 깨우고 염색을 해주고 카메라 앞에 앉힌다. 이 행위는 그녀를 카메라 앞의 피사체로 전환시키는데, 이때 엄마는 어쩔 수 없이 다소 경직되고 부자연스러워 진다. 그러나 다소 경직된 그 순간에 평소에 듣기 힘들었던 진심의 말이 쏟아져 나온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그녀는 이제 반대로 카메라를 들고 아들을 찍으며, 자신이 남편을 만난 것을 후회한다는 말을 뇌까진다. 이때 진무의 씁쓸한 표정이 그대로 카메라에 담긴다. 카메라의 앞과 뒤에서 포착되는 진실의 순간들, 카메라로 은유되는 영화가 만들어내는 삶의 파동이 이 장면에 담겨있다.



각자의 기억에 남은 과거의 시간, 영상에 기록된 과거의 시간, 그리고 오늘 우리가 마주한 일상까지. 이 순간들은 각자 다른 세계를 구성하며 독립적이고 온건하게 흘러간다. 마치 태양 주위를 둘러싼 행성들이 각자의 궤도를 돌며 그 자리에 버티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 독립적인 세계들을 관통하며 시간의 여러 층위를 드러내는 것은 '아버지'의 존재다.

아버지의 존재는 엄마에게 모진 폭력을 행사했다는 엄마의 기억 속에, 죽기 며칠 전에 '너네들끼리 잘 살 수 있겠냐'고 물었다는 진무의 기억 속에, 침울해져버린 아들의 표정 속에 점점히 흩어져있다. 그리고 서늘하게 땅 위로 드러나버린 백골과, 차마 그 모습을 오래 보지 못하고 뒤돌아버린 아들의 뒷모습, 한 때 그의 정정했던 모습을 담은 사진들 모두가 지상에 남겨진 아버지의 조각들이다. 여러 군데 남겨진 그 흔적들은 모두 우열을 가릴 수 없이 평등하게 '아버지'로 불리던 한 남자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아마도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아버지의 유골을 들고 줄지어 나오는 가족들의 모습을 담은 순간일 것이다. 그들의 모습처럼 우리도 일상 속을 빽빽히 채운 기억과 혼재하는 시공간 사이를 매일 산책한다. 만일 이 장면이 신비롭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영화가 우리의 일상 속에 박힌 과거의 시간, 이미지의 편린들을 우리에게 차곡차곡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작은 빛>은 오늘 하루 속에도 과거에서부터 건너온 이미지들과, 서로 다른 기억들이 무수히 박혀 은은하게 빛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독립적인 시간의 조각들은 서로 날카롭게 충돌하기보다, 각자의 색을 뽐내며 무지개처럼 어우러진다. 사진 속의 아버지와, 가족들의 기억, 그리고 백골로 남은 그 물질까지 모두가 빠짐없이 아버지를 이루는 조각인 것처럼 말이다.


진무가 병상에서 가족들과 캠코더에 찍힌 가족들의 모습을 돌려보는 장면은 흥미롭다. 곧 뇌 수술을 앞두고 기억을 잃을 위기에 처한 남자는, 캠코더를 통해 가족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들을 그들에게 일깨워준다. 이 장면을 보며 영상과 기억의 풍성한 결합이 신체의 병증마저 무화시킨다고 느껴도 좋을까. 이 장면은 카메라, 기억, 대화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얽어져 우리 일상을 아름답게 채우고 있음을 드러내는 장면이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서로 다른 기억들과 무수한 이미지들이 여러 층위로 혼재된 시간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고, 그 모든 층위를 포옹하며 당신과 두런 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작은 빛>은 그렇게 말을 건네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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