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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Feb 10. 2021

영화적 징벌을 향한 욕망, <소년 아메드>

마지막 장면에 대하여

※스포있음



지난해 개봉한 <소년 아메드>의 결말은 반전이라 할 만큼 충분히 충격적이다. 서사의 내용이 충격적인 것이 아니라, 영화가 한 시간 반 동안 보여준 소년 아메드의 규칙을 모두 어긴다는 점에서 그렇다. 마지막 5분 동안 아메드가 세우고 지켜온 규칙들이 모두 무너지니 말이다.


무슬림 소년 아메드(이디르 벤 아디)는 이슬람 극단주의를 접하며, 여자 선생님 이네스(메리엄 아카디우)와 손잡기를 거부하는 등 새로운 규율을 세워나간다. 그리고 여러 과정을 통해 그의 신앙은 갈등 상황에 놓이고 점차 긴장이 고조된다. 마지막에 이르러 아메드는 이네스를 처단하기 위해 그녀의 집 지붕 위에 올라갔다가 사고로 바닥으로 추락하고 만다.


결말에 이르러 돌연 등장하는 이 '추락'은 극 전체에 반전을 불러온다. 아메드는 예전과 달리 엄마를 간곡히 부르고, 청결을 유지하던 평소 모습과 다르게 온 몸에 흙을 묻히고 바닥을 기어간다. 여자와 닿을 수 없다며 악수를 거부하던 것과 다르게 이네스의 손을 덥석 잡고, 그녀를 해치려던 과거와 달리 울먹이며 용서를 구한다. 그러니까 추락한 그 바닥에서 아메드는 그간 자신이 쌓아온 규칙들을 모두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결말에는 이상한 점들이 있다. 어째서 아메드는 떨어진 사람들의 가장 평범한 반응, 제 자리에서 "도와달라"고 소리지르는 행동을 하지 않고 굳이 바닥을 기어가서 (이네스를 해치기 위해 준비한) 철심으로 벽을 두드려 구조를 요청하는가. 또 어째서 카메라는 아메드가 온 몸에 흙을 묻히며 기어가는 순간을 생략하거나 거리를 두지 않은 채, 정면에서 뚫어지게 응시하는가.


이런 얼룩들은 아메드의 규칙이 붕괴되는 과정을 전시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 들고 온 그 철심으로 구조를 요청해야 되기 때문에, 손쉽게 소리지르는 대신 기어야 했다. 그가 온 몸에 흙을 묻히는 과정을 전달주기 위해 카메라는 정면에서 그를 끊임없이 응시한다. 그러니까 아메드의 추락의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일련의 시퀀스는 영화적 전환을 보여주기 위해 그런 형식으로 그곳에 존재하는 것 같다. 괴로워하는 아메드의 모습을 보자면 그것은 극적 전환을 넘어 처벌의 순간으로 나아갔다고 느껴진다. 징벌의 끝에는 울먹이는 아메드가 있다. 마침내 소년에게 찾아온 몸과 신념의 대전환.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마지막 장면의 작위성을 외면하기 힘들다. 이 장면을 압도하는 것은 영화적 진실을 추구하려는 태도보다, 특정한 방향으로 소년을 이끌어 바뀌게 해야 한다는 욕망이다. 더구나 자신만의 리얼리즘을 추구해 온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서 이런 오점은 작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건 단순히 서사적 결함을 넘어, 다르덴 형제가 전하는 이야기와 감상을 관객으로서 온전히 믿을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그러니까 이건 영화적 완성도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로 보인다. 현실과 신앙의 긴장 사이에 놓인 어린 아메드로부터 무언가 이끌어내기를 원했다면 영화는 보다 신중하고 솔직하게 그에게 접근해야 했다. 유려한 연출과 생생한 활기를 보여주던 <소년 아메드>는 마지막에 이르러 감독의 욕망에 억눌려 버리고 만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나는 여전히 아메드에게 다가서지 못했다고 느꼈다. 이 영화의 마지막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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