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법칙
<빛과 철>은 두 남자의 차 사고를 둘러싼 진실을 추적한다. 그 과정에서 주변인들의 비밀도 들춰보는 서스펜스영화다. 그러나 마치 봉준호 감독의 영화처럼, 진실의 실체보다는 거기에 도착하는 과정에 도사리고 있는 전경들이 빛을 발한다. 봉준호의 서스펜스 뒤편에는 한국 사회의 뒤틀린 구조도가 펼쳐져 있다면, <빛과 철>의 후면에는 진실을 얻으려는 자가 관통해야 하는 엄중한 법칙이 버티고 있다. 진실에 다가서는 자와 그 주변인들이 감내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배종대 감독은 자신이 축조한 영화적 세계를 통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들려준다.
영화는 묘한 영상으로 시작된다. 도로를 따라가던 카메라는 이미 두대의 차가 파손된 사고 현장에 도착한다. 막 사고가 난 듯 열기가 가득한 현장. 여기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도로의 질료마저 감각할 수 있는, 현장의 생생한 현실감이다. 이 장면의 생생함을 기억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영화의 전반부에서 돋보이는 것은 서로 다른 기질의 두 여자가 충돌하는 과정이다. 핼쑥한 얼굴의 희주(김시은)가 버스에 앉아 있다. 그녀는 기사로부터 버스 터미널이 다른 곳으로 이전됐다는 말을 듣고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곧이어 공장으로 돌아온 그녀에게 지나가던 여자가 이곳에 있어도 되냐고 묻지만, 희주는 그 질문의 의미를 모른다. 그녀는 자주 자신이 놓인 상황에 무지하다.
곧이어 영남(염혜란)이 등장한다. 딸 은영(박지후)에게 이것 저것 지시하는 영남은 통제적인 성격으로 보인다. 하지만 딸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병원의 의사는 영남의 남편을 병원에서 내보내려 한다. 그녀는 늘 나빠지는 상황을 수습해보려 안간힘이다.
무지한 희주와 통제적인 영남. 다른 기질의 두 여자는 우연한 계기로 연결된다. 차 사고로 인해 그들의 남편 중 한명은 죽고, 다른 한명은 죽은 것과 다름없이 되었다. 무지한 희주는 그날의 진실을 파헤치려 하고 통제적인 영남은 덮으려고 애쓰는 가운데, 그들 사이를 불안한 얼굴의 은영이 오간다. 은영의 폭로를 도화선 삼아 두 여자의 본격적인 대결이 시작된다. 그러니까 영화는 이미 시간이 흘러 황폐하게 말라붙은 자리에서 그녀들에게 불쑥 질문을 던진다. 그날의 진실은 무엇이냐고.
그런데 이쯤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희주 역시 남편의 죽음에 무관하지 않음에도, 그녀가 그토록 끈질기게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이 질문의 답에 <빛과 철>의 특별함이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희주의 집념이 순수하게 남편에 대한 애정의 발로라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거기에는 지긋지긋한 ‘가해자’의 지위에서 벗어나 ‘피해자’임을 인정받고 싶다는, 그래서 영남에 대해 도덕적 우위에 서고 싶다는 말초적인 욕망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다. 잘못한 쪽은 내가 아니라 너라는, 관계의 전복이 가져오는 쾌감.
의도가 순수하지 않은 것은 영남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일상을 침범하고 들어오는 진실을 틀어막고, 현재의 상태에 균열을 내지 않는 것이다. 여기 순수하게 남편 혹은 진실을 위해 참전한 여자는 없다. 자신에게 덧씌워진 가해자의 굴레에서 벗어나겠다는 욕망, 가족을 방치해 참사를 불러온 주범으로 낙인찍힐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그녀들을 추동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진실을 좇는 계기에 관한 <빛과 철>만의 시선이 있다.
비밀을 고백하는 자의 얼굴
영화가 진행되며 숨겨졌던 비밀이 하나둘 수면 위로 드러난다. 누군가는 그날 밤에 했던 행동을 후회하고, 누군가는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비극의 진상에 눈을 뜬다. ‘무사고 1000일’을 내걸었던 공장의 비밀도 수면 위로 드러나고, 침묵했던 자는 괴로움을 뱉어낸다. 하지만 찬찬히 보자면 이들 중 누구의 행동도 (비난의 여지가 있음을 떠나서) 아주 충격적이거나 낯설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극한의 상황에 내몰렸을 때 할 것으로 예상되는 비윤리적인 행동에 속한다. 정작 놀라운 것은 희주와 영남을 둘러싸고 이렇게나 많은 이들이 여태 비밀을 숨겨왔다는 것과 그들이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힘겹게 그 비밀들을 하나둘 토해낸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비밀의 내용이 아니라, 그 묵직함과 끈적함이 우리를 아연하게 한다.
이 과정에서 <빛과 철>은 비밀을 고백하는 자의 얼굴을 끈질기게 담아낸다. 거기에 짙게 드리운 것은 깊은 죄책감이다. 그날의 참사로부터 무결하지 않다는 죄책감. 이 사고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는 자도 없지만, 이 사태로부터 윤리적으로 결백한 인간도 없다. 그들은 각자 생계를 위해, 신념을 위해, 실수로, 혹은 겁이 나서 후회할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모두의 가슴에 새겨진 한뼘씩의 죄책감.
이 힘겨운 고백들을 목도하며 우리는 그날의 진실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이유를 깨닫는다. 그것은 모두가 한뼘씩의 죄책감을 품고서 조금씩 침묵했기 때문이다. 마치 장례식장의 풍경처럼 모든 이들이 진실 위로 한줌씩의 흙을 뿌려 그것을 지면 아래로 파묻었다. 그렇기에 진실을 드러내는 것은 맨손으로 굳은 흙을 하나하나 거둬내는 고행을 요한다. 그것은 각자가 잊으려 했던 자신의 치부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괴로운 과정이다. <빛과 철>에서 진실은 장식장 안에서 우아하게 반짝이는 보석이 아니라, 환부에 찐득하게 달라붙은 피딱지에 가깝다. 그것은 간단히 꺼낼 수 없으며 통증과 출혈을 각오하고 들추어야 하는 것이다.
모두의 삶의 무게에 짓눌려버린 진실. 그것에 다가서려면 다른 이의 삶을 뿌리째 흔들 각오를 해야 하며, 그 대상은 때로 자신이 될 수도 있다. 남편의 비밀을 알게 된 영남은 (아마도) 공장에 불을 지르고, 희주는 어두운 방에서 칼을 든다. 이것은 마치 희주의 남편이 보관했던 연탄의 불이 영남의 손에 옮겨가고, 영남의 남편이 품었던 칼이 희주에게 쥐어진 것 같은 착각을 자아낸다. 진실로 다가서는 과정에서 드러난 죄책감과 괴로움은 다른 이에게도 옮겨 붙어, 마치 원혼처럼 <빛과 철>의 세계를 떠돌고 있다.
희주는 마지막까지 진실을 향해 질주하지만 결국 사고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한 마리 새끼 노루가 눈을 번쩍이며 도로 위에 서 있을 따름이다. 이것은 꿈인가? 환상인가? 이미 죽은 노루의 환영일까? 무엇이 되었든 여기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첫 장면의 생생한 현실감과 대비되는 초현실적인 감각이다. 그렇게 영화는 시작 장면과 결별하며, ‘생생한 사건의 진실’에 대한 관객의 기대와 환상을 조각내버린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그날의 진실이 아니라 그것을 좇는 과정에서 절감하게 되는 냉혹한 법칙이다.
<빛과 철>의 진정한 특별함은 서사나 서스펜스가 아니라, ‘진실의 법칙’에 관한 이 영화만의 통찰과 선언에 있다. 이곳에 절대적인 진실은 없다. 그것을 가리는 무거운 삶의 조각들이 있을 뿐. 그러니 타인의 삶을 헤쳐 진실에 다가서려는 자, 그 대가로 자기 삶을 걸어야 할 것이다. 이 엄중한 규칙으로 축조된 냉혹한 세계야말로 <빛과 철>의 성취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