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 <미쓰 홍당무>를 다루게 되어 마음이 흡족하고 기쁘다. 다른 것을 제쳐두고, 이 영화는 일단 정말 재밌다. 이경미 감독만의 Geek(괴짜)하고 통통튀는 유머로 점철된, 떡볶이튀김범벅 같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잠시 영업을 해보자면, 이 작품은 요즘 감성으로 봤을 때 꽤 힙하다. 2008년의 정서가 생생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까만 배경에 새겨지는 빨간 색 글자들. 폴더폰과 알록달록한 스킨. 성차심리학의 대중화에 불을 붙였던 그 저서,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그 시절 문제집에 늘 등장하던 '영어를 잘하는 세 가지 방법'과 같은 문구. 2000년대 후반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미지들.
이 영화에는 명대사들도 많은데, 박명수의 어록과 같이 못됐지만 속 시원한 대사들이다. 삐뚤어진 마음에 통찰을 주는 짓궃은 말들.
"너 착하게 살지마라. 그럼 사람들이 너한테 못되게 군다? 그런데 니가 못되게 굴잖아? 사람들이 너한테 착하게 굴어."
"너, 아무것도 열심히 하지마. 그래봐야 다- 너만 손해야. 괜찮아. 지금부터라도 요령껏 살면 돼."
"그래, 나도 알아. 내가 별로라는 거. 내가 내가 아니었으면 다들 이렇게 안 했을 거면서. 내가 나니까, 다들 일부러 나만 무시하고!"
다른 영화의 여자 주인공이라면 하지 않을 법한 대사들이다. 하지만 이경미의 여자들은 그것을 뻔뻔하게 내뱉는다. 아니, 내뱉지 않고는 도저히 성질이 나서 못살겠다는 표정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쓰 홍당무>만큼 여성 특유의 찌질하고 뻔뻔한 똘끼를 예리하고 유쾌하게 전달하는 영화도 드물다. 그것을 표현하는 공효진과 서우의 조합도 맛깔난다. 또 이 영화에서 황우슬혜는 무척 매력적인데, 어벙하지만 섹시하고 순진한 듯 하지만 어딘가 성깔있는 백치미를 완벽하게 표현해낸다.
이경미의 팬이라면 그녀만의 트레이드 마크들이 곳곳에서 튀어오르는 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편집증적인 생각들. 이것은 <비밀은 없다>에서 집착 광기에 가까운 스릴러로 표출된다면, 이 영화에서 코메디로 재현된다("난 재재재작년 그 날, 티코 안에서 진실했어!")
아이들의 운율 섞인 낭독. <미쓰 홍당무>에서는 다음 싯구가 배경음악처럼 반복된다. "이 때 나는/내 뜻이며 힘으로/나를 이끌어가는 것이/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은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반복됐던 "내 몸이 좋아진다, 좋아진다…"를 떠올리게 한다. 이경미는 아이들의 단체 낭독에 묻어있는 주술적이고 코믹한 분위기를 잘 캐치해낸다.
본격적으로 <미쓰 홍당무>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이 영화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삽질'이다. 영화가 그걸 얼마나 대놓고 보여주냐면, 시작되는 순간부터 양미숙(공효진)은 마구 땅에다 삽질을 하고있다.
그녀는 줄곧 의미없는 몸부림을 친다. 자기 나름대로는 계략을 세워 철두철미한 노력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남들이 봤을 때는 그냥 딱 삽질이다.
피부과 의사를 앉혀 놓고 심리상담을 하고, 서종철(이종혁)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유리(황우슬혜)를 좋아했고, 둘을 떨어뜨려놓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둘은 사실 이미 헤어진 사이다. 그녀의 행동은 자기가 직접 판 구덩이에 철푸덕 주저앉은 이미지와 정확히 겹친다.
그래도 여기까진 양반이다. 야한 것을 싫어한다는 이유리의 말을 믿고 서종철의 아이디로 그녀에게 음담패설을 쏟아내지만, 의외로 이유리는 그 과정을 즐긴다. "더! 더!"를 외치는 이유리를 향해 울며 겨자먹기로 메세지를 보내기도 한다.
삽질은 이유리도 만만치 않다. 이 영화의 가장 코믹한 부분 중 하나는, 이유리가 물품보관실 한 구석에 아무것도 모르는 서종철을 불러다가 야한 동작을 선보이는 장면이다.
하지만 삽질들은 끝내 민망함을 자아낸다. 서종철이 매몰차게 나간 뒤 벽 뒤에 숨어있던 아이가 슬그머니 밖으로 나올 때. 모텔의 커튼을 열어젖혔는 데 커튼 뒤로 창 대신 딱딱한 시멘트 벽이 있을 때, 양미숙과 서종희(서우)가 전교생 앞에서 공연을 하겠다며 공연장 위에 멀뚱히 서 있을 때. <미쓰 홍당무>는 관객들로 하여금 공감성 수치심을 느끼게 만든다.
하지만 그녀들은 야무지게 말한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이상해 보이는 사람의 말도 한 번쯤은 들어봐야 되는 것 아냐? 그것은 과한 포장도 아니고, 적극적인 옹호도 아니다. 차라리 이들의 말을 한 번 찬찬히 들어보라는 톡 쏘는 제안처럼 들린다.
결국 미숙과 종희는 졸업식 날에 공연을 한다. 둘 위로 쓰레기가 날아들지만, 이들은 엉뚱하게도 전교생이 그들을 응원한다고 생각하며 깔깔거린다. 아 이다지도 어이없는 긍정.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양미숙이 피부과 선생님에게 고백을 한다. 의사는 황당한 표정이지만, 빙그레 미소짓는 양미숙은 이전보다 조금 편안해 보인다.
야유를 응원으로 착각하고, 다짜고짜 고백을 해대며그녀들은 마지막까지 삽질을 한다. 이들의 앞날은 마냥 희망차 보이지 않고, 남들 사이에 무난히 섞여 들어갈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그런 삽질조차 응원하기 위해, 잠시나마 행복한 순간으로 바꾸어 주기 위해 <미쓰 홍당무>는 여기에 있다. 조금 이쁘지 않아도, 민망해도 괜찮다며. 그렇게 현실을 포장하지 않는 소박하고 유쾌한 긍정으로 영화는 그녀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또박또박 전하는데 성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