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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Apr 05. 2021

폭력 한가운데서 만난 여자들, <마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마녀>(2018)의 재밌는 점 중 하나는 자윤(김다미)과 닥터 백(조민수)의 관계다. 그들은 유사모녀의 관계를 맺으면서도, 서로를 없애기 위해서 달려든다. 둘은 안 좋은 측면에서 모녀지간처럼 닮았다. 상대가 인간으로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한 그 잔혹하고 유희적인 폭력성. 노부부가 빛의 세계에서 자윤의 부모라면, 어둠의 세계에서 자윤의 엄마는 닥터 백이라고 할 것이다.


유사모녀가 폭력적으로 대립하는 영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김혜수와 김고은이 주연을 맡은 <차이나타운>(2015)도 같은 사례였다. 그러나 <마녀>에는 또 다른 요소들도 더해진다. 두 여자 사이에는 '미치광이 박사와 피조물'의 관계성도 보인다. 그래서 닥터 백은 괴물 같은 자윤을 제거 혹은 폐기하려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도 손댈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능력을 지닌 자신의 피조물을 자랑스러워한다. 광기에 찬 자윤의 미소는 이런 닥터 백의 기대와 만족감에 조응한다. 둘은 서로를 증오하면서도, 서로의 우월함과 희소성을 알아볼 때 생겨나는 은밀한 연대감을 공유한다. 제대로 된 맞수를 만났을 때의 반가움.


그들은 적대하며 인정한다. 조커와 배트맨 사이에서 나올 법한 감성이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영웅과 반영웅의 궁합도 느껴진다. 자윤은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닥터 백을 공격하고, 닥터 백은 여기에 맞서는 자신의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윤을 위협하므로 이들에게서 영웅-반영웅의 관계가 스쳐 지나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대립하는 여자들은 익히 있어왔다. 그러나 유사모녀, 창조자-피조물, 영웅-반영웅과 같이 다채로운 결을 자아내는 여성 커플은 많지 않았다. 이런 조합으로 인해 관객들은 둘을 보며 풍부한 해석과 상상을 펼칠 수 있게 된다.



내게 있어 <마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마지막 장면이다. 닥터 백의 동생(조민수)은, 자윤으로부터 그녀를 지키려는 긴 머리 소녀(정다은)에게 "엄마는 괜찮다"고 말하며 안심시킨다. 자윤은 그 소녀에게 "언니에게 까불면…"이라고 운을 떼며 도발한다. 그러니까 이곳은 엄마, 언니, 마녀 같은 여성형 호칭이 우글거리는 여자들만의 닫힌 공간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성 공통의 이슈가 아니라, 오로지 각자의 이해관계 때문에 한 자리에서 우연히 만났다. 여성의 이슈를 떠나 각자의 사정으로 한 자리에 모인 여성캐릭터를 본 지가 언제인가. 게다가 그들 사이에는 폭력의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엄마 언니, 이해관계, 폭력, 세 여자. 이 언발란스한 조합은 짜릿하다.

 

마지막에 카메라가 이들을 비출 때, 이곳이 여자들이 폭력으로 쌓아 올린 닫힌 공간이라는 점을 절감하게 된다. 말과 시선이 오간다. 긴장이 용광로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빽빽한 공기 한가운데 세 여자가 있다.  장면이 좋은 이유를 두고 무거운 해석을 덧붙이고 싶지 않다. 다만 그때의 인상을 얘기해주고 싶다. 그 흔치 않은 광경이 인장박히듯 눈에 들어와 박혀 버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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