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는 그 작품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설명할 방법이 없는, 매우 생소하고 독특하며 고유한 감상을 만들어낸다. 그 감상은 마치 처음 보는 심해 생명체처럼 낯설어 징그럽지만 희귀하고 신비롭다는 점에서 한 동안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이따금씩 기억을 열어 그 생소한 감상을 다시 불러와 손끝으로 조금씩 더듬어 맛보다가 다시 조심스레 마음 한 켠에 보관해두게 된다. 이것은 그 영화가 얼마나 연출적으로 훌륭한지, 얼마나 깊은 감동을 선사했는지와는 별개의 문제다. 엘리자 히트맨의 <전혀아니다, 별로아니다, 가끔그렇다, 항상그렇다>(2019)는 정확히 그런 영화다.
영화의 서사는 별다를 게 없다. 고등학생 어텀(시드니 플래니검)은 임신을 하게 된다. 아이의 아빠가 누군지, 그 과정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어텀이 부르는 노래를 통해 그것이 아픈 기억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따름이다. 어텀이 수술비를 구해 임신중절 수술을 해주는 병원을 찾아 수술을 받는 것이 이 영화 내용의 전부다. 영화는 소녀의 임신과 수술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다. 다만 어텀의 여정을 따라가며 그 과정의 감각을 여기 이곳에새겨넣으려고 한다. 그녀가 묵는 곳에 온기는 있었을까. 따뜻했을까, 서늘했을까, 아니면 추웠을까. 병원을 찾아 길을 걸을 때 그녀의 표정은 어땠을까. 슬펐을까, 우울했을까, 무감각했을까.
이 영화를 통해 접하는 10대의 임신은 크게 두 가지로 감각된다. 당혹스러운 노출과 아릿한 통증.
어텀이 무대 위에서 노래를 한다. 사랑의 고통을 언급하는 그녀의 어색한 노래는 듣는 이를 되려 곤혹스럽게 만든다. 그때 관객석의 누군가가 야유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고, 주눅이 든 채로 울먹이며 2절을 이어가는 어텀의 모습이 힘들어보인다. 그녀는 진료소에 도착해 임신 테스트를 한다. 이 때 영화는 그녀가 화장실에서 옷을 벗고, 임신테스트를 진행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그대로 보여준다. 임신을 확인한 어텀은 집에 돌아와 홀로 가만히 코에 피어싱을 한다.
고백과 같은 노래, 관객의 모욕. 돌발적인 임신 소식, 살을 뚫는 악세서리. 이런 이미지의 연속은 10대 소녀인 어텀에게 성(姓)의 경험이 당혹스러운 노출과 뒤이은 고통으로 감각됨을 보여준다.
그녀는 방문한 병원에서 설문조사를 진행한다. 질문자는 그녀에게 '전혀아니다, 별로아니다, 가끔그렇다, 항상그렇다' 중 하나를 대답하라고 한다. 그리고 거듭되는 질문과 답변을 보고있자면, 이 답변들로 그녀가 겪은 진실의 지근거리에 다가갈 수는 있어도 그것을 직시할 수는 없음을 느끼게 된다. 상투적인 언어로 설명할 길 없는 개인의 감정과 경험들. 오로지 질문과 답변의 반복으로 지속되는 이 장면은, 규격화 된 언어로 진실에 도달할 수 없음을 폭로하고, 언어의 실패를 외롭게 감당해야 하는 한 소녀의 표정을 물끄러미 응시한다.
어텀과 그녀의 친구는 종종 손을 잡는다. 그러나 나는 이 동작이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다. 이것을 위로의 제스처로 해석하고, '수술대 위에 외롭게 누운 소녀 그리고 수술비를 감당하기 위해 모르는 남자와 어울리는 소녀의 친구'로 내용을 정리하는 것은 이 영화를 간편하게 이해하고 단순하게 분노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담고 있다. 발가벗겨지는 노출의 순간들. 아릿한 통증. 덤덤한 발걸음. 아주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두 소녀의 동행. 우연히 마주친 남자. 볼링장과 출혈. 키스와 수술대. 가벼운 질문과 단순한 답변. 여기 채 담지 못한 표정과 짧은 침묵. 이런 장면의 연속이 우리 안에서 만들어내는 차갑고 민망하며 고요한 감상. 그것은 이 영화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장면을 견뎌 기어코 그 감상을 맛보는 것이야말로 <전혀아니다, 별로아니다, 가끔그렇다, 항상그렇다>를 경험하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