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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넷플릭스에서 개봉될 이경미 감독의 신작 <보건교사 안은영>을 기다리며 그녀의 전작들을 몰아보던 중 <페르소나>(2018)에 대한 감상을 적지 않았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 느낀 주관적인 감상들을 끄적여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페르소나>는 이경미, 임필성, 전고운, 김종관 4명의 감독이 각각 아이유를 뮤즈로 찍은 단편들을 묶은 작품이다. 대단히 기대를 했지만 뚜껑을 열고 보니 그냥저냥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당시에 <페르소나>에 대한 글을 따로 적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 한국의 젊은 감독들 중에서 나는 이경미를 가장 좋아한다. 그러나 <러브세트>를 보고서는 작은 우려가 생겨났다. 과연 그녀의 영화적 세계는 탐구를 지속하며 성장하고 있는가? 이미 성취한 자신만의 영역에서 안도하며 고여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우려가 생긴 이유는 이 영화가 이경미의 맛있는 특기를 모아놓은 안전한 작품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딸(이지은)과 아빠의 여자친구(배두나)가 아빠(김태훈)를 두고 테니스로 한 판 승부를 벌인다는 설정은 얼핏 도발적으로 보이지만 낯설지 않다. 또한 두 여자의 욕망을 중심으로 이 상황을 풀어가는 영화의 행로와 거기서 도출되는 쾌감은 너무 익숙해서 안온하다. 테니스를 치는 신음에 가까운 소리, 즙이 가득한 자두를 먹는 입, 무릎에서 흐르는 새빨간 피, 가쁜 숨소리와 몸의 움직임 등 의도가 빤히 보이는 그 설정들은 자극적이지만 호기심을 자아내지는 못한다. 여기서 두 여자 사이의 상호작용은 관계와 섹스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뿌리채 흔들거나 감각을 새로이 일깨우는 대신, 익숙한 방식으로 말초신경을 건드릴 따름이다. 물론 <러브세트>는 적당히 귀엽고 은유적으로 야한 작품이다. 그리고 영화의 이쁘고 안전한 태도가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관계, 특히 여자들 사이에 대한 고민과 탐구를 작품에 녹여냈던 이경미가 이런 작품을 내놓는다면 그건 좀 다른 문제다. 대단히 지루하거나 비윤리적이라고 말 할 수는 없겠지만, 내게 <러브세트>는 어찌보아도 이경미의 퇴보다.
<페르소나> 중에서 볼 만한 작품을 하나만 꼽으라면 전고운 감독의 <키스가 죄>를 꼽겠다. 이 작품은 한 소녀의 입장에서 어느날 갑자기 친구가 사라졌을 때의 긴장감, 그 친구가 멍자국을 달고 나타났을 때의 당혹감, 그것이 키스마크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흥분, 친구의 머리를 싹둑 잘라버린 친구 아빠에게 복수를 가할 때의 장난기를 차례로 담고 있다. 사실 두 소녀들이 계획하는 복수는 딱히 목적이나 이유가 없어보이고, 그들을 추동하는 것은 분노보다는 첫키스가 가져온 흥분감이다. 이지은도 복수를 계획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혼자서 손목에 키스마크를 만들어보지 않던가. 소녀의 키스는 작은 산골 마을에 말 그대로 불을 지피고, 산불경비대인 아빠조차 이 사태를 막지 못한다. 바다로 달려가는 두 소녀들의 발걸음이 사뿐하다.
아이유는 <페르소나>의 네 작품 중 <키스가 죄>에서 가장 자연스럽고 좋은 연기를 선보인다. 네 감독의 페르소나로 스크린에 왕림한 그녀가 정작 가장 편안해보이는 순간이 드레스 대신 추리닝을 입고, 남자를 유혹하는 대신 또래 여자아이와 낄낄대는 순간이라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이 점은 연출가들이 아이콘 '아이유'의 후광에 눌려 정작 연기자로서 이지은의 활용법을 놓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게 한다. 아이유는 남자 배우를 상대할 때 이쁘지만 여자 배우를 상대할 때 훨씬 생기발랄하다. 그리고 <키스가 죄>처럼 상대 배우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고 조용히 귀 기울일 때 단단하고 성숙한 연기를 펼친다. 만약 아이유가 다음 작품에서 연기변신을 꾀한다면, 여성 버디무비에서 모성애를 발휘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뮤즈로서 아이유가 가진 매력을 극대화 해서 예쁜 이미지로 엮어낸다는 점에서 <썩지않게 아주 오래>와 <밤을 걷다>는 비슷한 맥락 위에 있다. 물론 전자는 팜므파탈과 무력한 한 남자를, 후자는 꿈과 죽음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그 서사 위에 알알이 맺힌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이 영화들의 진정한 욕망인 것 같다.
간혹 리듬이 둔탁해지는 순간들도 있다. 그건 아마도 아이유의 이러저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 혹은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두 작품 모두 아이유의 이미지를 탐닉하듯 얼굴 클로즈업을 길게 끄는 장면들이 있는데, 그 순간이 다소 길고 아직 아이유 역시 이런 숏의 지속을 견딜 정도로 연기력이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장면들은 자칫 지루하다 느껴질 정도로 위태롭다. 이런 둔탁함은 스타의 존재감이 영화를 누른 안좋은 사례로 보인다. 그에 대한 해답은 위에서도 말했듯 뮤즈와 연기자, 영화의 관계에 대한 성찰에서 건져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