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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Jan 25. 2020

여성 퀴어영화의 선언,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여성 퀴어영화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을까. 남성의 자리로 명명된 곳에 여성을 소환할 때 일어나는 물리적 파편 너머를 응시할 수 있을까. 여성에게 가해지는 이성애의 폭력, 소수자에게 가해지는 규범의 제약을 고발하는 데서 나아갈 수 있을까. 남성영화와의 차이에 의존하지 않고 완전히 새로운 질서와 규율로 홀로 설 수 있을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저력은 그것이 '여성 퀴어영화'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데 있다. 영화는 다른 것들이 반복했던 지루한 공식을 답습하지 않는다. 가령, 착취적 시선에서 벗어나 여성의 눈으로 본 여체의 아름다움을 웅변한다거나,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무해한지에 천착한다거나, 여성들의 성을 눈요깃거리로 전락시키는 누를 범하지 않는다.


유한한 여성들의 세계

영화는 여성들만의 세계에서 시작된다. 마리안느(노에미 메를랑)는 엘로이즈(아델 하에넬)의 약혼자에게 전달할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이곳에 왔다. 자신의 눈에 비친 상을 다른 남성에게 전달할 사자로서 온 것이다. 그러나 둘이 사랑에 빠지며 그녀의 시선에 담긴 엘로이즈는 회화의 모델에서 연인으로 변모한다. 이들의 공간에는 남성이 없지만 어떠한 결핍없이 고유한 리듬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이곳은 엘로이즈의 결혼 전에 잠시 주어진 유한한 낙원일 따름이다.


그래서 얼핏 보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제약에 눈 감은 채, 평온함을 기만적으로 유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제약과 폭력을 시종 똑똑히 응시하고 있다. 다만 그것을 영화적으로 소화하는 방식은 여느 영화들과 다른 것 같다.



죽음의 이미지로 감각되는 외부세계의 규율

이들은 그들만의 낙원에서 사랑을 만끽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외부세계의 엄혹한 규범에 부딪칠 터다. 그런데 영화에서 동성애에 가해지는 사회의 폭력은 단단한 물리적 감각으로 체화되지 않는다. 그들을 떼어놓는 거친 손과, 모욕하는 송곳같은 말이 이곳에는 없다. 대신 그들이 부딪치는 시대적 한계는 주변에 스민 죽음의 이미지로 감각된다.


벼랑에서 떨어져 운명을 달리한 엘로이즈의 언니. 마리안느를 만나자마자 벼랑을 향해 내달리는 엘로이즈. 임신 사실을 알고부터 해변을 달리고, 천장에 불길하게 매달리는 소피(루아나 바야미). 이곳에서 관계는 탄생하자마자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죽은 아내를 찾아 저승에 갔다가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아내를 구출하지 못하는 '오르페우스의 신화'도 반복된다. 그런데 엘로이즈는 이 신화를 두고 "에우리디케(죽은 아내)가 오르페우스와 이별하고 싶어서, 그를 불러 뒤돌아보게 한 것"이라 말한다. 죽은 아내 스스로 이별을 선택한 것이라는 해석.

그리고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와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엘로이즈의 환상을 본다. 그들의 관계는 마침내 엘로이즈의 이별선언으로 끝이 나고, 마리안느가 마지막으로 뒤돌아본 엘로이즈의 모습은 에우리디케의 이미지와 포개어진다. 그러니까 이 세계에서 동성애가 부딪치는 한계는 주변을 어른거리는 죽음의 냄새로, 언제든 툭 끊어질 수 있는 단절의 예감으로 상존한다.  



결단의 주인

그러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죽음처럼 침잠한 시대 속에서도, 그들은 능동적인 관계의 주체로서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마리안느를 떠나 결혼을 향해 나아가는 엘로이즈의 모습은 그 시절 여성들에 대한 편견에 균열을 낸다. 그녀의 모습은 이 여성들이 시대적 한계 앞에서 눈물짓거나, 그것의 극복을 위해 싸울 것이라는 이분법적 생각을 가뿐하게 비껴간다.


소피가 임신을 했을 때에도 영화는 아이의 아버지를 찾지 않는다. 대신 달라질 운명 앞에서 결단을 내리는 소피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볼 따름이다. 수술 후에 늘어진 소피를 두고 엘로이즈는 이 순간을 그림으로 남기자는 제안을 한다. 어두운 방 안에서 수술의 순간이 재현되고, 이들의 모습은 회화로 남는다.


그들의 활동을 두고 유희적이며 능동적인 선택이라 부르기는 어쩐지 저어된다. 어쩌면 이것은 권리없는 이들의 선택을 가장한 도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저항할 수 없는 바람에 내몰려 내린 선택이라 하더라도, 여기에는 이들에게 주어진 결단의 자리를 함부로 다른이에게 내어주지 않겠다는 영화의 선언이 엿보인다. 이것은 여성의 일이고, 결단은 이들의 몫이라는 선언. 그래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운명의 주인을 선언하는 단단한 여성영화라 부를 만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성취는 그것이 여성 퀴어영화로서 보여준 정체성에 있다. 고유한 리듬으로 움직이는 여성들의 세계와, 죽음의 냄새로 새겨진 시대의 폭력과, 그 안에서 내려진 결단들. 이 독특한 조합이 그 시대를 살다간 어떤 여인들의 고고한 품격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엘로이즈는 입을 굳게 다문 인상이지만, 마리안느의 눈에 포착된 그녀는 자주 붉게 타오른다. 영화의 마지막, 오페라를 감상하는 엘로이즈는 다시 한 번 감성의 불길에 휩싸인 것 같다. 들리지 않지만 온 몸을 휘감는 그 조용한 불길이 그 시절을 살다간 여인들 사랑과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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