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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Mar 23. 2021

내가 정한 나의 서사, <몰리스 게임>

※스포일러 있음



영화는 지하 포커 세계를 군림했던 '몰리 블룸'의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녀는 12살에 허리에 철심을 박는 대수술을 겪고도 스키 선수로 성장해 대회에 출전했다가 어이없는 사고로 완주에 실패한다. 눈 위에 쓰러진 그녀를 뒤로 한 채 영화의 제목이 떠오른다. Molly's Game. 어쩐지 궁금해진다. 영화가 말하는 몰리의 '게임'이란 무엇일까. 얼핏 보면 그것은 실패를 거듭하는 몰리의 인생을 가리키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과연 정말 그런가?


영화가 시작되면 몰리의 여성성을 상기시키는 말들이 자꾸만 등장한다. 그녀는 불편감을 내비치며 그 말들을 거부한다. 'Poker Princess(포커 공주)'라는 별명에 몰리는 대답한다. 공주는 나같은 짓 못해요. 재판을 유리하게 끌고가기 위해, 변호사는 몰리에게 그녀가 단순히 포커 하우스의 '칵테일 웨이트리스'였다고 말하자고 제안한다. 몰리는 단박에 거절한다. 자신은 웨이트리스가 아닌 운영자였으므로.


웨이트리스가 아닌 운영자. 영화의 초반부는 이 사실을 주지시키기 위해 소요된다. 그녀는 딘 키스(제레미 스트롱)로부터 독립해 포커 하우스를 차리고, 플레이어 X(마이클 세라)의 훼방에도 재기에 성공한다. 판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멤버들에 대한 장악력을 강화한다. 그렇게 차츰차츰 몰리는 포커 하우스의 진정한 주인으로 변모한다. 실권을 쥔 운영자가 되어가는 것이다.


더글라스 다우니(크리스 오다우드)의 고백에 몰리가 보인 반응은 신선하다. 사랑한다는 고백에 그녀는 자신의 하우스 노하우를 늘어놓는다. 물론 그것은 당신의 고백이 자신이 의도한 자극에 대한 반응에 불과하다는 잔인한 거절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녀가 단순히 No 라는 거절에서 멈추는 대신, 경영자로서 자신의 이야기 꺼내놓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단순한 거절을 넘어 정체성에 대한 언급으로 나아가는 행위이다. 자신은 열애 대상으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이곳의 'CEO'라는 선언. 당신은 나의 여성적인 매력에 반한 것이 아니라, 경영자로서의 실력에 흔들린 것이라는 지적. 여기에는 '여성 서사'를 거부하고 오로지 '승리의 서사'만을 남기겠다는 굳은 태도가 엿보인다.  



그러니까 <몰리스 게임>에서 몰리가 끊임없이 몰두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하게 인정받는 일이다. 아일랜드 사람이 아니냐는 질문에 몰리는 긴 설명을 거쳐 대답한다. 나는 러시아계 유대인이야. 이 장면에서 서사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녀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녀 단순한 대답 대신 긴 설명을 덧붙인다. 그렇게까지 공들여 자신의 핏줄을 설명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몰리에게는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오해를 벗는 일이 매우 중요한 것 같다. 이것은 동시에 자신에게 덧씌워진 잘못된 이야기를 벗고, 진정한 이야기를 전파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에서 여태 몰리를 믿지 않았던 변호사 찰리 재피(이드리스 엘바)는 검사들 앞에서 열을 올리며 그녀를 변호하기에 이른다. 재밌는 것은 이것이 공식적인 증언을 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사법의 바깥 자리에서, 몰리의 변호사이자 이야기의 청자로서 찰리는 몰리를 옹호한다. 그 이야기에 감화를 받은 검사들은 새로운 제안을 하고, 판사도 몰리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린다. 이 때에도 역시 영화는 재판을 이긴 법적 논리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저 간단하고도 건조하게 몰리의 이야기가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응시한다. 그렇게 몰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설득시키는데 성공한다.



다시 묻고 싶다. 몰리의 게임이란 무엇일까. 간단히는 포커를 지시하며, 넓게는 포커 하우스를 차리고 재판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하나의 게임이 있다. 그것은 자신이 선택한 서를 전달하는 일이다. 특히 자꾸만 그녀를 향해 침습하는 '여성 서사'를 거부하고 자신이 원하는 승리의 서사를 전달하는 일. 경영자, 승부사로서 인정받는 일. 그것이 이 스크린에서 펼쳐진 몰리의 게임이라면, 그녀는 이곳의 승리자다.


영화가 몰리 주위에 펼쳐진 여성 서사를 거부하는 태도가 인상깊다. 그녀는 그저 간단히 'No'를 표시한 뒤 자신의 이야기를 마저 이어간다. 그 거부의 과정에 지나친 시간이 할애되지 않는다. 종종 여성 서사를 거부하는 지나치게 긴 시간과 큰 에너지를 소요하는 영화들이 다. 때로 그 과도함은 의도와 다르게 오히려 어떤 인물을 '여성'의 틀에 가두는 악효과를 거두기도 한다. 그런 와중에 만난 <몰리스 게임>의 간결하고 간소하며 꼿꼿한 태도가 마음에 들어온다. 어쩌면 이런 태도가 진정한 '여성 영화'의 새로운 덕목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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