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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Jan 19. 2020

정돈할 수 없는 우리의, <결혼이야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노아 바움백 감독을 썩 좋아하지 않음에도 <결혼이야기>는 근래에 유일하게 괜찮게 본 영화다. 요즘의 영화계, 특히 한국 영화계가 얼마나 척박하고 지루한지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말하려고 한다. 갈증 끝에 만난 즐거운 소품, <결혼이야기>(넷플릭스)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할 말이 있을 것 같다. 


영화가 시작된지 얼마되지 않아 우리는 첫 번째 배신은 겪는다. <결혼이야기>는 처음 나래이션으로 제시되는 달달한 신혼 이야기가 아니라, 이혼에 관한 이야기다. 그렇다고 이혼의 서사가 선명하게 제시되는 것도 아니다. 영화를 보다보면 가끔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그 주된 이유는 반복되는 서사의 실패에 있다. 


이들이 이혼에 이르는 과정은 조각난 이야기들의 연속이다. 소송을 맡을 변호사를 찾고, 서로의 비밀을 알게되고, 때때로 싸우는 이야기들은 서로 매끈하게 통합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느슨한 유기성을 지니고 중심 서사(둘의 이혼)에 들러붙어 있지만, 바깥을 향해 돌출되어 있다. 이것은 마치 가지치기가 되지 않은 채 제멋대로 자라버린 나무를 연상시킨다. 끈끈하고 유기적인 서사의 부재.


영화 속 인물들도 서사의 실패를 반복한다. 생각하자면 처음부터 니콜(스칼렛 요한슨)은 자신의 생각을 찰리에게 전하는데 서툴렀고, 찰리(아담 드라이버)는 니콜이 겪은 시간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의 결혼생활은 둘 사이에도 소통되지 않는다. 

찰리의 첫 번째 변호사는 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결혼이야기를 재구성하지만, 찰리는 그 이야기 앞에서 주저하며 머뭇거린다. 그의 두 번째 변호사는 인간적이지만, 조정 과정에서 찰리의 이야기를 관철시키지 못한다. 니콜과 찰리는 법정에 앉아 그들의 변호사들이 벌이는 이야기의 난장을 지켜본다. 하지만 그 난장판 안에서도 그들의 진정한 '결혼이야기'는 없는 것 같다.


그들은 종종 느닷없이 노래를 부른다. 나는 이 장면들이 꽤 이상하다고 느꼈는데, 이 장면들은 그들의 상황을 완벽히 대변하지도, 그렇다고 (뮤지컬 영화와 같은) 명징한 쾌감을 선사하지도 않는다. 그 노래들은 성공도 실패도 아닌, 영화의 어정쩡한 위치에 머물다가 흘러가버린다. 마치 이 노래들도 그들을 대변할 수는 없다고 푸념하듯 말이다.

찰리와 니콜의 격렬한 싸움도 일순간 폭발한 후 지나가 버린다. 니콜의 감동적인 글을 읽고 흘리는 찰리의 눈물도 영화에 진한 인장을 남기지 못한다. 다시 무사하고 평온하게 시작되는 일상.    


그러니까 <결혼이야기>는 이들의 '결혼'을 하나의 '이야기'로 담을 수 없음을 조용하게 고백하는 영화라고 느껴진다. 운명적 결합, 세속적 계약, 전통, 제도, 생존... 결혼을 둘러싼 수많은 서사들이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다. 그러나 <결혼이야기>를 다 보고 나서도 니콜과 찰리를 이해하기란 쉽지가 않으며, 그들의 결혼에 대해 뭐라 설명하기도 어려워진다. 아마도 노아 바움백은 무수한 서사의 실패를 통해서만 '결혼'에 대한 이야기에 닿을 수 있다고 느끼는 것 같다.  

결혼을 경험하지 않은 입장에서 그의 말이 맞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때때로 다시 이 영화를 찾을 것 같다. 문득 어느 한 장면을 바라보며, 그들이 느꼈을 감정을 조용히 상상해보며. <결혼이야기>는 오랫만에 만난 즐거운 소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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