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타 거윅의 전작인 <레이디 버드>(2018)를 높이 평가하지만 그녀에 대해 품게 된 하나의 의심이 있었다. 이 의심은 <작은 아씨들>(2019)을 보고서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레타 거윅의 영화에서는 늘 그녀가 '여성세계에 대해 품는 판타지'가 얼마간 느껴진다. 순수하지만 에너지 넘치고, 재잘거리는 수다가 끊이지 않으며, 외부세계로부터 상처받은 여성을 보듬고 치유하는, 따듯하고도 원숙한 세계가 그것이다.
나는 누군가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세계라는 의미로 '판타지'라는 용어를 썼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여성세계에 대한 판타지를 가지는 주체는 남성들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판타지는 얼마간의 거리감과 무지 위에 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레타 거윅의 영화를 보며 여성이 여성 세계에 대해 판타지를 갖는 것 역시 가능함을 느낀다. 이것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맥락을 떠나, 아름다운 여성만의 세계를 확고한 형상으로 지향할 수 있음이 놀랍다는 의미이다.
재잘거리는 수다와 우당탕탕 발걸음 소리가 일렁이는, 여자들만의 순수한 세계. 그것이 그레타 거윅이 긍정하는 여성세계의 원형적인 모습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작은 아씨들>에서는 이런 판타지의 농도가 <레이디 버드>보다 짙게 느껴진다. 그것은 어쩌면 거윅의 실제 고향인 새크라멘토를 배경으로 한 <레이디 버드>에 비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은 아씨들>이 그녀에게 조금 더 많은 상상력을 요구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동시대의 현실 대신 연출가의 상상으로 채워넣은 <작은 아씨들>은 거윅이 생각하는 여성세계의 모습을 비교적 명징하게 담고있다.
그리고 나는 종종 거윅이 스스로 만든 여성관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받아 조금은 안타까운 마음이다. 그녀의 영화 속 여성판타지는 관객이 용인할 수 있을 정도의 스타일과, 여성에 대한 편견 사이를 아슬하게 넘나드는 것 같다. 그래서 일보 양보해 이런 연출을 거윅의 스타일로 인정할 수는 있어도, 그녀를 두고 여성을 온전히 바라보는 여성주의 작가라고 부르기는 못내 저어된다. 그러니까 거윅은 자신의 영화안에서 스스로 창조한 이상적인 뮤즈들로 인형놀이를 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나 <작은 아씨들>은 무수한 흠결에도 불구하고, 고전 속 여자들을 살아있는 인간으로 소환하는 일에 기어코 성공해낸다. 나는 그녀가 여성 캐릭터에 숨결을 불어넣는 솜씨에 자주 감탄하고는 한다. 나는 어린 여자들이 고백에 실패하고 가족과 이별하며 여린 살결 위로 거친 흉터를 품는 과정을 마냥 지켜보게 된다. 거윅의 특기는 다시 한 번 내 맘을 관통한다. 그녀를 향한 의심과 버릴 수 없는 애정 사이, 그 어딘가에 영화 <작은 아씨들>은 놓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