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홍수정 Oct 04. 2020

'이경미 월드'에 대한 간단한 지도(map)


※스포일러 있습니다.


<보건교사 안은영>의 넷플릭스 개봉을 맞아, 이경미 월드의 지도를 소개해보려고 한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원작이 따로 있는 작품이기 때문에 아래 글은 이경미의 전작들인 <미쓰 홍당무>(2008), <비밀은 없다>(2016), <페르소나-러브 세트>(2019)를 더 많이 참고해 썼다.


이경미 세계의 주인공은 줄곧 여자였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들 중 남자와 보편적인 섹스를 하는 여자는 없다. 그렇다고 그녀들이 성(性)에 무관심한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녀들은 끊임없이 좋아하는 남자와의 육체적인 접촉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촉각을 곤두세운다. 하지만 그 남자들의 시선은 주인공이 아닌 다른 '이쁜 여자'에게 향하기 일쑤다.  


<미쓰 홍당무>의 이유리


이경미 세계에서 '이쁜 여자', 혹은 여우같은 지지배의 관상은 따로 있다. 희고 동그란 얼굴에 쌍꺼풀이 크고 땡그란 눈, 약간은 맹한 듯 순해보이는 표정을 장착한 얼굴이 그것이다. <미쓰 홍당무>의 이유리(황우슬혜), <비밀은 없다>의 손소라(최유화), <보건교사 안은영>의 성아라(박혜은)가 이런 특징을 공유한다. 큰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해사한 매력으로 남자들의 눈길을 쓸어가는 그녀들은 왠지 주변에 한 명쯤 있을 것 같은 '이쁘고 얄미운 지지배'의 느낌으로 등장한다. 그 캐릭터들의 매력 때문인지, 이경미 영화에서 이쁜여자로 등장한 배우들은 자주 대중의 주목을 받고는 한다.

여담으로 <미쓰 홍당무>에서 종철의 아내(방은진)와 <러브 세트>에서 아빠의 여자친구(배두나)는 모두 말괄량이 주인공을 제압하는 쿨하고 멋진 어른 여자의 캐릭터에 속한다.  


<미쓰 홍당무>의 양미숙


반면 이경미 월드의 주인공들은 좀 성격이 다르다. 그녀들은 ("저 여자랑 결혼하지마, 아빠"라고 말하던 <러브 세트>의 아이유처럼)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고 그것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데 부끄럼이 없다. 또 (수사 기록을 얻기 위해 자기 손을 가위로 찌르던 <비밀은 없다>의 연홍처럼)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자기파괴적일 정도로 악착같이 덤벼들고, 자신을 방해하는 상대의 멱살을 움켜쥔다. 그들은 자기 생각을 속사포처럼 와다다 내뱉어서 상대가 질려버리게 만드는가 하면 (빗으로 머리를 두드리는 <비밀은 없다> 연홍처럼) 종종 강박적이고 지나치게 실리적이라 보는 사람이 부끄러워질 지경이다. 그들은 캔디나 하니처럼 전통적인 여성 캐릭터가 지녔던 천진난만함과 밝음이 없고, 우아하지 않으며 예쁘게 보일 생각도 없다.

  

그녀들에게는 늘 내(가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 하지만 그 남자들은 그녀들의 뜨거운 애정에 관심이 없거나, 예쁜 여자와 노는 쪽을 선호한다. <미쓰 홍당무>의 서종철(이종혁), <비밀은 없다>의 김종찬(김주혁), <러브 세트>의 아빠(김태훈)까지 그들은 모두 서글서글한 인상의 미남이지만, 사랑에 있어 깊은 감정선은 없고 예쁜 여자와 시시덕 대는 정도의 모습으로 등장하며, 주인공들의 욕망에 응답하지 않는다.


<러브 세트>의 아이유


그렇기 때문에 "캔디도 아니면서 온 동네 남자들이 다 좋아하는 저 얄미운 지지배"에 대한 질투, "내 남자를 채간 저 여우같은 X"을 응징하겠다는 분노의 감정이 이경미 월드를 추동하는 원동력이 된다. 나는 의식적으로 따옴표 안의 표현들을 썼는데, 그건 웃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런 표현의 어감이 영화에서 느껴지 감정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이때 분노의 감정은 <비밀은 없다>에서와 같이 죽음을 불사할 정도로 어둡고 강렬하게 터져나오기도 하고, <미쓰 홍당무>에서처럼 코믹하게 그려지기도 하며, <러브 세트>에서와 같이 투정섞인 어리광에 가깝게 표현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들의 분노감이 현실을 정조준하는 날카로운 무기라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그것은 오히려 그녀들이 자신의 세계와 화해하기 위해 풀어야 할 감정에 가깝다. <미쓰 홍당무>의 양미숙은 이유리를 방해하는 과정에서 종희(서우)와 단짝이 된다. <러브 세트>의 아이유는 배두나를 노려보지만, 그녀로부터 성장 혹은 패배를 배우게 된다. 유일하게 <비밀은 없다>에서 연홍은 실제로 악당을 처단한다. 하지만 그 과정의 진정한 목표는 나쁜놈을 단죄하기보다, 죽은 딸을 이해하는 것에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이경미의 세계에서 분노는 누군가를 해하는 실체있는 감정보다는, 이경미의 여자들을 일으키고 성장하게 하는 동력으로 작동하고 있다.

 

어쩌면 애초부터 이경미의 세계에서 남자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여자들의 전쟁에서 촉매제로 작용했다가 사라지기 일쑤이며, 결국 그녀들에게 위안을 주는 것도 새로운 사랑이 아니라 비슷한 여성들간의 우정이기 때문이다.  


<보건교사 안은영>의 안은영


최근 정세랑의 <보건교사 안은영>을 이경미가 영상화한다는 얘기를 듣고 약간의 의문이 들었다. 내가 볼 때 정세랑의 원작에는 이경미 월드에 늘 너울거리던 '내 남자를 향한 욕망'과 '뺐어간 여자에 대한 분노'가 잘 보이지 않으며, 있다 하더라도 결이 매우 다르다. 그래서 이 시리즈에서 내가 가장 관심이 갔던 부분은, 정세랑의 깨끗함과 이경미의 폭력성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느냐는 점이었다. 나는 이 시리즈가 원작과 꽤 다른 느낌이거나, (안좋은 경우) 이경미 특유의 활기가 보이지 않는 작품이 되겠다는 우려를 했다. 하지만 공개된 영상을 보고 나니 이경미가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또 다른 세계를 구축해가고 있다는 생각을 들었다. 그에 대한 얘기는 나중에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전 11화 세계의 바깥에서, <스파이의 아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