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의 절묘한 부분은 사토코(아오이 유우)와 그의 남편 유사쿠(타카하시 잇세이), 그리고 야스하루(히가시데 마사히로)가 유지하는 긴장에 있다. 계략과 애정을 오가는 그 섬세한 줄다리기는 <색, 계>(2007)를 떠오르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 그들의 관계를 하나로 언급하기 어렵겠지만, 내가 인상깊었던 부분은 사토코와 유사쿠 사이의 좁혀졌다 멀어지는 아슬아슬한 거리감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내게 '스파이의 아내가 되고 싶었던 여자의 이야기, 혹은 '남편의 곁에 머물며 이 세계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 싶었던 여인의 이야기'로 다가온다. 그 부분에 집중해서 말하려고 한다.
나는 스파이의 아내가 될 거에요
<스파이의 아내>(2021)를 보다보면 이상하게도 애정어린 사토코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남편은 그다지 사랑하는 사이처럼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이 둘 사이에 불길하게 벌어진 미묘한 틈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감격에 겨워 남편 유사쿠를 끌어안는 사토코의 상기된 얼굴 뒤로, 동지들에게 무언의 지시를 보내는 유사쿠의 차가운 눈빛이 뒤따른다. 이 장면에서 주목되는 것은 이 둘 사이의 감정의 온도차다. 또 유사쿠는 사토코와 얼마간의 계획을 공유하지만, 그녀에게 전부를 알려주지 않는다. 그들 사이에는 유사쿠가 필사적으로 유지하는 간격이 있다. 사토코는 그 벌어진 틈 너머에서 짐짓 행복한 듯 예쁘게 웃음 짓고 있지만, 그 웃음은 어딘가 불안해보인다.
그래서 '스파이의 아내'가 되겠다는 사토코의 야심찬 포부도 불안하게 들린다. 이것은 유사쿠의 동행이 없다면 이룰 수 없는 꿈이 아닌다. 그가 자신의 옆자리를 사토코에게 내어주지 않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사토코는 나름의 노력을 다한다. 그 노력은 때때로 유사쿠를 놀라게 만들어 그를 압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때 뿐이다. 유사쿠의 행동은 사토코의 예상을 벗어나고, 결국 그녀는 홀로 남겨진다. 유사쿠의 세계에 들어가 '스파이의 아내'를 꿈꿨던 그녀의 꿈도 좌절된 채 남겨진다.
차가운 실패의 행적
이 영화의 제목이 '스파이'가 아니라 '스파이의 아내'라는 점에 다시 한 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조그마한 변주로 인해 영화는 성공이 아니라 실패에 관한 이야기로 남게 된다. 그런데 실패 그 자체보다,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이 더욱 인상적이다. 그녀는 유사쿠와 호흡하며 뜨겁게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홀로 미끄러지며 차갑게 실패한다. 그녀는 고문조차 감내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유사쿠는 그런 위험을 사토코에게 안기지 않는다. 늘 사태를 먼저 파악하는 유사쿠와 달리 사토코는 자주 당황하고 어리둥절해 한다. 스파이의 아내를 외치는 사토코의 온도는 그런 그녀를 조용히 지켜보는 유사쿠와 늘 어긋난다. 배려과 배격 사이, 그 어딘가에 유사쿠의 냉담한 친절이 존재한다.
사토코는 유사쿠가 찍은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일이 있다. 영화 안에서 사토코의 얼굴은 관객들이 탄복할 정도로 아름답고도 흡입력 있게 등장한다. 나는 사토코가 늘 주인공을 욕망한다고 느낀다. 어쩌면 그녀는 스크린을 넘어 현실에서도 주인공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의미있는 무대에 오르기 위해 유사쿠를 좇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기에 배에 홀로 남는 것은 (비록 미국으로 향하는 것보다 안전하다 쳐도) 사토코에게 주어질 수 있는 최악의 결말이다. 그것은 남편과의 이별이자, 더 이상 동지로서 동행할 수 없다는 선언이며, 자신이 바라던 무대의 주인공이 될 수도 없고, 더 이상 이 세계에서 의미있는 자리를 찾을 수 없다는 확인사살일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 영상을 보며 유사쿠의 계획을 알게 된 그녀가 내지르는 감탄사는 흡사 비명처럼 들린다. 이 세계에서 '스파이의 아내'가 되겠다는 꿈도 이곳에 조각난 채 버려진다. 이 순간 사토코는 유사쿠의 세계로 편입되는데 실패할 뿐 아니라, 그를 통해 이 세계에서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는 데에도 실패한다. <스파이의 아내>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실패 그 자체가 아니라, 마치 위성처럼 유사쿠로부터 한 발 짝 떨어진 곳에 머물다가 그로부터 조용히 탈락되어 세계의 바깥을 향해 점차 멀어져가는 사토코의 외로운 움직임과 리듬이다.
이 세계에서 자리를 찾지 못한 여인은 결국 다른 세계, 정신병동으로 간다. 곧이어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폭탄이 떨어지고 포화가 터지는 시뻘건 세상. 곧이어 사토코가 홀로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해변을 휘적휘적 걷는다. 구겨진 종이처럼 엎드려 오열하는 사토코. 전쟁의 뜨거운 화기(火氣)와 여인의 고독한 울음. 하나로 섞이지 못한 채 따로, 연이어 등장하는 두 장면. 이것은 앞선 세계에서 사토코의 자리를 찾을수도 없고, 그녀에게 울음을 허락할 수도 없다는 서늘한 고백처럼 들린다. 영화는 울음짓는 그녀의 곁에 어느 누구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어떤 연출보다도 마지막의 몽타주는 가슴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