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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Apr 12. 2022

나의 작가 자아를 소개합니다

글 쓰는 자아는 따로 있을까?

내 경우에는 그런 것 같다


생각난 김에 나의 작가 자아에 대해 소개해보려고 한다. 뭐라 부르기 애매하니 일단 '그녀'라 하겠다. 성별이 여자인 것은 확실해 보이므로.


그녀는 나보다 어린것 같다. 내가 한창 감수성 예민하던 시절에 그녀가 태어났으므로. 가끔 세상 다 산 듯 초연한 표정으로 헛소리를 해대지만, 실은 연로한 척 연기하는 것 일 뿐이다. 


그녀는 건방지다. 비교적 일찍, 운 좋게 등단해서 그런 것 같다. 그리고 자신이 홍수정의 자존감 대부분을 떠받들고 있다고 생각해 의기양양하다. 빈정 상하지만, 사실이다.


그녀는 관종이다. 나와는 다른 부분이다. 그래서 뭐라도 쓰려고 난리다. 관심받는 순간의 행복감이 스스로를 폭로하는 순간의 쪽팔림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 글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종이 그렇듯, 그녀 역시 관심이 사라지면 초조해한다. 그때부터는 내 멱살을 잡고 흔들어대기 때문에, 나는 종종 어지로움을 느낀다.


그녀는 주책맞다. 시시콜콜한 것들을 나불대고, 글만 잘 나오면 얼쑤 절쑤 하면서 춤을 춘다. 진짜 창피해 죽겠다. 


뻔뻔하고 무대뽀다. 시원하게 글을 갈긴 뒤, 나중에 감당해야 될 상황은 생각하지 않는다. 어차피 뒷수습은 그녀가 아닌 나의 몫이므로(야 이 X아).


그녀는 잠이 많다. 아침에는 안 일어난다. 낮에도 쳐잔다. 그렇게 깨우려고 노력해 봤는데, 비몽사몽한 상태로 재미없는 소리만 웅얼댄다. 그리고 저녁쯤 상쾌한 얼굴로 일어나서는, 즐겁게 놀고 싶어하는 내 마음 한 구석을 콕콕 찔러낸다. 빨리 글 쓰자며. 이 X 때문에, 아니 그녀 때문에 재미있는 것들을 포기한 채로 어두운 방에 박혀 키보드를 두드려댄 지가 얼마인가. 하아, 내 인생.


그녀는 샘도 많다. 이것 역시 나와 다른 부분이다. 어느 훌륭한 글을 보고서는 나는 왜 이런걸 못 쓰냐며 눈물을 뚝뚝 흘리며 대성통곡을 했다. 그런데 그 글을 쓴 분은 이미 일가를 일군 선생님이었다는 게 어이없는 부분이다. 이력이나 모든 측면에서 그녀와 비교가 안되는 대작가였던 것. 그녀는 '그딴거 모르겠고 나도 잘 쓰고 싶다'고, '지금 당장 잘 쓰고 싶다'고, 어린애처럼 팔다리를 흔들어대며 난동을 부렸다. 그래도 다행히 펜을 쥐어주면 금새 조용해진다. 


의외로 노력파다. 그런데 이상한 방향으로 노력파다. 외부에서 얻는 지식도 중요하지만, 타고난 감각이 중요하단다. 그래서 몸의 예민함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그녀는 자신의 감각을 갈고 닦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한다. 나는 그럴 때마다 그녀가 마치 예술의 신과 만나기 위해, 목욕재개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산을 오르는 무녀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녀는 까탈스럽고, 욕심이 많으며, 예민하고, 성질도 드럽다. 잘 상처받고 잘 극복하며 생기발랄하고 혈기왕성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비록 그녀 때문에 괴롭지만. 혼자였던 시절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사실 나를 살게 하는 것은 그녀인데 욕만 해댔지 별로 해준 게 없는 것 같아 반성중이다. 그녀를 잘 성장시키는 것이 남은 내 삶의 기쁨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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