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영화평론가 홍수정
Nov 29. 2020
오래전부터 내가 믿은 신념 중 하나는 '작가는 노력이 아닌 체질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밖에서 주입된 무언가가 아니라 내면에 갖고 태어난 무언가가 우리를 작가의 길로 인도한다. 이건 "글쓰려면 타고나야 돼" 따위의 잘난 척으로 오해받기 쉬운 발언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작가적 인간'과 아닌 사람을 가르는 타고난 '기질 혹은 체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그만큼 결정적인 요소라고 생각하므로.
내가 볼 때 사람의 기질을 가르는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는 그가 '고민을 쥐고 있는 시간'이다. 누군가는 고민이 생기면 그것의 핵심을 빠르게 파악하고 결론을 낸 뒤 떨궈낸다면, 누군가는 고민을 둘러싼 파장을 하나하나 응시하고 음미하고 괴로워하다 마지막에 결정의 순간으로 나아간다.
성격의 색채가 다를 뿐이라 좋고 나쁨을 가를 수는 없다. 일상에서 보면 전자는 빠릿빠릿하고 경쾌한 반면 후자는 느리고 답답해보인다. 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풍성한 사고는 공유되지 않으며, 겉에서 볼 때는 이 사람이 생각이 많은 것인지 없는 것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고민을 오래 쥐고 이리저리 살펴보며 생각을 뻗어내는 습성을 우린 다른말로 '사색'이라 하고, 작가는 이런 답답이들 가운데 많이 숨어 있다.
장고하는 버릇은 '소심한 것'과는 좀 다르다. 소심한 성격이 결과를 감당하지 못해 결정을 회피한다면, 장고하는 사람들은 고민의 다양한 이면을 보기 위해 결정을 유예한다. 짐을 오래 들기 위해서는 팔근육이 필요하듯이, 고민을 머리 위에 오래 지고있는 것에도 상당한 에너지가 드는 법이다. 그래서 여러가지 고민을 오래 마음에 담아두고 제대로 장고할 수 있는 사람은 오히려 마음이 큰 대심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고민을 오래 지속할 수 있다고 하여 곧 작가는 아니다. 사색을 통해 현상에 대한 자기만의 해석을 도출하고, 그것을 글로 적확하게 표현하는 것까지 나아가는 이가 작가다. 혹은 몸으로, 그림으로, 음악으로 표현하는 아티스트가 된다.
이런 작가적 인간들의 감성에는 대체로 우울이 자리잡고 있다. 그 우울이 마음 한 켠에 몰래 자리잡아서 그의 말에서, 표정에서 우울감으로 은근하게 배어날 수도 있고, 감성의 대부분을 차지해서 세상 고민을 다 지고있는 듯 어두운 얼굴로 드러날 수도 있다. 혹은 정성스런 손길로 오래 숙성되어 달콤한 향기를 풍길수도 있는 것이다.
이들이 공유하는 우울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다. 작가는 오래 품는 고민으로 늘 근심스럽고, 세상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므로 뒤쳐져 남겨진다. 어떤 시대에서든 행복은 메인스트림의 감성이며, 우울은 사회의 외곽에서 고민하는 소수의 것이다.
같은 얘기를 선인들의 입을 빌어 할 수 있을 것 같다. 고대 히포크라테스 학파는 인간을 지배하는 요소로 4액체설을 지지하며, '흑담즙'의 영향을 많이 받아 유독 차갑고 건조한 인간들이 보이는 우울한 증상을 '멜랑콜리(melancholy)'라고 이름붙였다. 이후 르네상스를 비롯해 오랜 세월 동안 멜랑콜리는 천재적 인간이 가진 광기로 받아들여졌다. 세계의 이면을 보고 시대의 병증을 몸으로 앓으며 자기만의 언어로 풀어낸다는 점에서, '천재'를 '작가' 혹은 '아티스트'로 바꾸어도 무관할 것이다. 결국 작가와 사색과 우울은 떼어낼 수 없을 정도로 끈적한 친연성을 지니고 있다.
예전에 작사가 김이나가 방송에 나와 '강아지를 툭 던져주면 보내지 못하고 끝까지 키울 것 같은 사람'이란 표현을 쓴 것을 기억한다. 이 말을 비틀어보고 싶다. 사소한 생각거리도 쉽게 보내지 못하고 꼭 끌어안고 쓰다듬다 조심스레 내려놓는 사람이 있다. 그런 미련한 인간들이 지닌 사색과 우울이야말로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그저 기질로서 작가의 특징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