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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Feb 24. 2018

조민기의 행동은 왜 연애가 아니라 성폭력일까

최근 연예계 미투 운동에서 폭로된 몇몇 성추행의 양태를 살펴보면 뭔가 좀 다른 부분들이 보인다. 언급하기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으나 공개해준 피해자들의 용기에 힘입어 몇 자 얹어보려 한다. 일단 우리가 익히 생각하는 성추행, 혹은 성폭력은 대개 폭행에 가까운 경향성을 보인다. 일례로 오달수에 관한 주장(갑자기 바지에 손을 집어넣어 휘저었다)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행위 자체가 폭력적이어서 통상 연인 간이라도 성추행이 될 법한 행동들이다.


그런데 조민기나 여타의 몇몇 성추행들은 그 성격이 약간 다르다. 같이 여행을 가자고 제의를 한다거나, 남자 친구와의 관계에 대하여 묻는다거나, 호텔에서 스킨십을 한다거나 하는 행위들 말이다. 이것은 물론 기본적으로 성폭력이지만, 합의되지 않았기에 문제가 되는 것들에 가깝다. 그들이 행위는 마치 아주 매력적인 사람이 당연히 받아들여질 줄 알고 던지는 추파, 혹은 아주 가까운 이성 사이에서 허심탄회하게 나누는 대화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최근 진보 인사에 대하여 폭로되는 성추행에 이런 유형들이 많은 것 같다.


이런 류의 성추행이 가지는 난감함은 그들이 이를 두고 '사랑' 혹은 '대쉬'라고 주장할 때 발생한다. 그들 역시 성애와 성추행 사이의 경계 짓기의 모호함을 알고서 서슴없이 우기는 것이리라. 그래서 대개 우리는 그 모호함을 피하여 "아내도 있는 사람이 감히" 혹은 "딸 벌 되는 여자에게 한참 나이 많은 남자가 추잡스럽게"라는 언어들로 그들을 단죄한다. 그러나 이 문제의 핵심은 단순히 불륜이나 나이차, 혹은 성적 합의의 유무에 있지 않다.


이런 류의 성추행에서 가장 특징적인 점은, 그들이 자신의 행위를 '연애'라고 주장하지만 자기 자신을 보편적인 연애의 기준으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보통 성욕을 충족시키고 싶지만 도덕심이 훼손되는 것은 싫으므로, 젊고 아름다운 이성 혹은 동성이 자신의 처지(나이 많고, 결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권위에 매력을 느껴서 자발적으로 (성폭력이 아닌) 성관계를 했으면 좋겠다는 욕망을 가진다. 이때 이들은 상대와 자신을 매우 다른 기준으로 평가한다. 그래서 상대의 매력은 보편적인 성애의 기준에서 평가하면서도, 스스로의 매력에 대하여는 가부장적 기준을 들이댄다. 자신은 권위 있고 업계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므로 성적으로도 매력 있다는 식이다. 그리고는 이중 잣대의 이상함을 외면하고, 자신의 지위에서 오는 강압성을 모른 척 한 채, 짐짓 나는 순수하게 대쉬하는 것뿐이라는 식으로 상대에게 접근한다.


이것은 언뜻, 남녀의 기준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착오적 사고방식, 혹은 자신의 매력을 맹신하는 도취적인 자신감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행위의 문제는 자신의 욕망과 상대의 욕망의 무게를 다르게 평가하는 이중성에 있다. 그들은 남을 평가할 때는 남자이고, 내가 평가받을 때는 가부장이다. 그러다 보니 젊고 아름다운 상대를 마음껏 욕망하는 동시에 자신은 그런 기준에서 벗어나서 존중받는다. 이것은 사실 나의 욕망은 귀하나 너의 욕망은 천하다는 이기적 사고의 발현이다. 그러나 이것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기에 '개인의 취향'이라는 도깨비방망이를 들이대며 얼버무린다(취향이 다른 것 뿐이잖아).


언제나 기득권이라는 것은 너와 내가 평등하지 않다는 이중 잣대로 드러난다. 그 이중 잣대에 대한 핑계는 많다. 더구나 연애나 성애라는 것은 정말로 취향이 다양하여 일말의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마치 구속되는 재벌 총수가 모두 휠체어에 실려 가며 이번에는 진짜 아프다고 말하듯이, 약간의 미약한 가능성을 핑계로 자기만은 사랑이었다고 변명하곤 한다. 그런 뻔뻔함을 감수할 수 있는 환경이 바로 권력이다.


그러나 복잡할 땐 기본으로 돌아가듯, 성애의 기본 역시 합의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아무리 여러 가지 핑계를 들이밀어도(성폭행이 아니라 성관계다, 격려하려고 한 번 툭 쳤다) 그것이 끝내 애정이 아닌 성추행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진정한 합의를 결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상대와의 합의를 자신의 가부장적 권위로 대신한다. 여기에 사랑을 가장한 성폭력의 본질이 있다. 그들은 상대의 보편적인 취향이나 최소한의 합의를 삭제하고 그 자리에 자신의 권위를 욱여넣는다. 나의 권위는 너에게 당연히 매력적이어야 하며, 그래서 나는 누구와도 잘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전설의 패왕색이라도 된 마냥 거리낌 없이 접근하고 성폭력을 행하고도 부끄러움이 없다. 나는 이윤택의 변명에도 분노를 느끼는데, 그는 반성하는 성폭행범이 아닌 마치 금방 차인 소년인 마냥 이야기를 한다. 그의 사고는 아직도 저런 차원에 머물러 있다.


그래도 정말이지 진심으로 이런 이중적 사고를 매번 사랑이라고 착각하였다면(난 니가 이뻐서 반했고, 넌 내가 가부장이라 반했을거야) 그건 치료가 필요한 퇴행적 사고다. 그러나 저런 사고 수준으로 어느 분야의 권위자가 될 수는 없다. 그들도 사실 다 알고 있다. 알면서도 모르고 싶었을 것이고, 들이대는 상대마다 특이 취향이길 바랬을 것이다. 그리고 이게 나만의 착각인들 내게 별 영향은 없을 것이라 안도하였을 것이다. 이건 성추행이 아니라 대쉬이고, 도덕문제가 아니라 여자문제니까. 거기에는 남성 중심적 사회가 자신의 행동을 문제 삼지 않을 것이라는 암묵적인 계산도 들어있다. 젠더 폭력은 그리 단순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대개는 이렇게 몇 겹의 뒤틀어진 사고를 거쳐서 발현된다. 다만 저 풍부한 사고 중에 유일하게 배척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상대의 보편적인 욕망과 상처에 대한 고려이다.

요컨대 그들은 자신의 보편적인 성욕은 견고하게 지키면서도, 타인의 보편적인 성욕은 제멋대로 삭제하고 상대가 자신의 가부장적 지위에만 성욕을 느끼기를 강요한다. 이런 일련의 사고방식이 바로 성폭력이다.

 

종종 나이 많은 남자와 나이 어린 여자의 연애에 관한 드라마가 만들어질 때, 적지 않은 여성들이 그런 설정만으로도 불쾌감을 느끼고 무언가를 불안해한다. 어린 여자가 늙은 남자를 사랑하는 이야기. 이 단순한 설정은 특이한 사랑이야기에서 머물지 못하고 불쾌감을 자아내는 그 무엇으로 번진다. 그것은 여성들이 보편적인 욕망을 삭제당하고 가부장적 질서에 성욕을 느끼기를 강요당한 경험을 공유하기 때문이며, 그런 대상으로 간단하게 타자화되던 기분 나쁜 기억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미투 운동이 진정 의미가 있는 것 타인의 욕망을 재단하는 행위가 사랑이 아니라 폭력임을 다시 한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잘못된 것은 성욕을 느끼는 행위가 아니라, 타인의 성욕을 자신에게 맞추길 강요하는 사고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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