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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Aug 28. 2022

<놉>은 스펙터클을 경고하는 영화일까?


※PD저널에 기고한 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미국 영화계에서 핫한 '조던 필'은 우리나라에서도 인기가 좋은 감독이다. 깜짝 놀란 표정으로 의자에 얼어붙은 흑인 청년(<겟 아웃>), 가면을 든 채로 눈을 희번득하게 뜨고 정면을 응시하는 여자(<어스>). 그의 작품들은 사회적 차별을 다루면서도, 강렬한 비주얼을 자랑해왔다.   


그러나 <놉>은 이런 경향에서 약간 비켜갔다. 이미지의 강렬함은 여전하지만 '차별'에 대한 관심은 옅어졌다. 대신 그가 이번에 주목하는 것은 바로 '스펙터클'이다. 


<놉> 스틸컷

압도적인 스케일, 본 적 없는 이미지, 외설적인 비주얼. 우리의 눈길을 확 사로잡는 것들은 '스펙터클'을 만든다. <놉>은 그것에 매혹되는 우리를 정조준한다. 비윤리적인 장면 앞에서도 눈을 떼지 못한 채로 '좋아요'를 누르며 더 많이 보기를 갈망하는 사람들. <놉>은 스펙터클에 대한 맹목성을 포착한다.


침팬지 고디에 대한 일화를 기억해보자. 흥분한 고디가 날뛰면서 사람을 때려도 관중들은 그것을 쇼로 소비한다. 참극의 현장에서 울먹거리던 소년은 자라나서 쇼의 호스트가 되었다. 주인공 OJ(대니얼 칼루아)도 마찬가지다. 그는 괴물을 보고서도, 이것을 촬영해 오프라쇼에 출연할 생각만 한다.


여기서 조던 필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만한 연출이 등장한다. 제자리에 얼어붙은 채 꼼짝도 못하는 사람들. 조던 필은 자주 '통제력을 상실한 신체'에 대한 공포를 드러내 왔다. <겟 아웃>(2017)에서는 최면 때문에 <어스>(2019)에서 계급 때문에 주인공들은 몸을 마음대로 가누지 못한다. 조던 필에게는 의지를 벗어난 신체 자체가 공포인 셈이다. <놉>에서는 스펙터클에 압도되어 얼어붙은 몸이 그렇다. 입을 떡 벌린 채 눈 앞의 광경에 사로잡힌 이들은 모두 죽고 만다.


그러니 세간에 이런 평가가 나온다. <놉>은 스펙터클을 경계하는 영화라고. 그것에 무방비하게 현혹되는 우리에게 경고를 보내는 영화라고. 그렇게 보일 만한 여지가 있다.


일단 <놉>은 스펙터클이 환영에 불가하다고 속삭인다. 괴물 '진 재킷'을 향해 달려가는 말의 이름은 '고스트'이고, 괴물을 잡겠다고 나서는 직원의 이름은 '엔젤'이다. 엔젤은 운명적인 사랑과 UFO의 존재를 믿는다. 유령, 천사, 운명, UFO... 실체 없는 환영의 표지가 진 재킷의 주변을 맴돈다. 진 재킷에게 잡아 먹히지 않으려면 쳐다보지 말아야 하는데, 이것은 스펙터클이라는 환영에 홀려 자신을 잃지 말라는 경고처럼 들린다. 


그렇다면 진 재킷을 물리치는 자 누구인가. 바로 '서부 사나이'다. OJ는 마치 서부극처럼 말을 타고 달리면서 진 재킷을 유인하고, 서부 사나이를 닮은 인형은 진 재킷을 파괴한다. 마지막에 이르러 말 위에서 영웅처럼 나타나는 OJ. 말 할 것도 없이 서부극 속 단독자의 형상이다. 스크린 위의 환영을 깨부수는 서부 사나이. 엔딩 장면에서 울려 퍼지는 서부극의 사운드트랙. '스펙터클을 거부하고 서부극의 정신을 되새기자'는 메시지처럼 읽힌다. 그러니 <놉>이 스펙터클을 경고하는 영화라는 평이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평에 동의하지 못하겠다. 영화의 이미지는 다른 말을 하고 있으므로.


영화가 '진 재킷을 보면 안 된다'는 규칙을 강조하기 때문에, 관객인 우리도 여기 동화된다. 그래서 진 재킷을 보는 것에 대한 공포를 어느새 공유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궁금해진다. 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왜 사람들은 그리도 놀라는 것일까? 금기에 대한 공포와 매혹은 동시에 커져간다. 그것이 최고조에 이를 즈음, 영화는 진 재킷의 형상을 말 그대로 전시한다. 그리고 카메라는 그것을 정면에서 응시한다. 온 몸을 활짝 펼친 채로 사각의 입구를 펄럭거리는 진 재킷의 형상은 외설적이다. 스펙터클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이 광경은 거듭 반복된다. 그 후 진 재킷은 사라지지만, 앞선 장면의 잔상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영화는 스펙터클을 거부하자고 말하고 있지만, 뒤로는 그것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고 외설적으로 충족시킨다. 경계하자고 말하면서도, 거기에 매혹되고 굴복하고 마는 것이다. <놉>은 스펙터클을 경고하면서 그 과정을 다시 스펙터클로 소비하는 영화다. 나는 거기에서 기만을 느낀다.


사회적 문제를 영화 안에서 사유하던 조던 필. 그는 이번에는 돈이 될 만한 광경에 카메라부터 들이대는 사회의 천박함을 응시한다. 그리고 서부극으로의 회귀를 시도한다. 그 시도는 아름다워 보이지만, 어쩐지 설득력이 부족하다.


조던 필은 전작들은 교훈적이지 않아도 솔직했다. 그는 사회적 갈등을 호러 장르의 문법 안에서 펼친 다음, 시원한 액션으로 날려버렸다. 여기에는 깊이가 없지만, 대신 자기 기만도 없다. <놉>은 새로운 문제 의식을 내세우며 영화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는 한편 새로운 시도를 하는 영화다. 분명 진전이라 할 만한 부분들이 있다. 그럼에도 내게는 그의 전작들만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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