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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Mar 05. 2018

확산과 회복의 움직임, <더 포스트>

영화 비평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진실을 향한 카메라의 시선

영화는 베트남 전쟁의 한가운데서 이를 기록하는 남자의 모습이 하나의 눈동자로 수렴되며 시작한다. 이 장면 만으로 우리는 이 영화가 전쟁에 대한 기록과 그것을 독점한 자들에 관한 영화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남자가 비행기 속에서 이동하자 카메라는 그를 따라간다. 베트남 전쟁의 무용성을 이야기하는 남자와 이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정치인의 모습. 카메라는 그 자리에서 진실이 공유되는 장면을 고요히 응시한다.

그리고 비행기가 착륙하자, 카메라는 특이하게도 정치인을 찍는 기자들 사이에서 출발하여 그에게로 다가간다. 그 정치인은 언론인들 앞에서 베트남 참전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거짓말을 전한다. 이 장면은 즉각적으로 비행기 안에서 나누던 베트남전 무용론에 관한 이야기를 회상케 한다. 언론은 결코 이 전쟁의 진실에 다가갈 수 없으며 한 정치인의 허울 좋은 거짓말 만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영화의 카메라는 많은 순간 누군가의 시선을 대리한다. 그 시선은 줄곧 전쟁에 관한 진실에 향하며, 시선 주체의 권력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누구나 진실을 보려 하지만 아무나 그것을 볼 수는 없다. 누군가는 진실의 핵심에 접근하여 그 실체를 보고, 누군가는 진실을 담은 보고서를 보며,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는 정치인의 얼굴밖에 보지 못한다. 결국 이 영화가 다루는 '신문'이라는 것은, 전쟁의 참상을 육안으로 목격한 자가 자신의 시선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시선은 보고서로, 보고서는 활자로 변환되어 마침내 그 날의 진실을 전하며, 우리는 그 일련의 과정을 영화로서 보게 된다.


이와 관련된 중요한 장면이 있다. 한 남자가 보고서를 훔쳐서 전쟁의 진실을 전하고자 한다. 이 남자가 복도를 따라 방으로 들어갈 때 카메라는 남자를 따라간다. 그리고 서랍의 문을 열어 마침내 보고서를 찾는 순간, 카메라는 서랍 밑에 위치하여 이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이 구도는 워싱턴포스트의 편집장 벤(톰 행크스)이 보고서를 접하는 순간에 다시 한번 재연된다. 곧, 보고서가 중요한 이에게 발견될 때마다 이 구도가 반복되는 셈이다. 물론 이는 단순히 촬영 방식의 하나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발견의 순간마다 반복되는 동일한 구도, 그리고 보는 이의 시선을 대리해 온 영화의 문법을 생각할 때, 이 장면들은 마치 보고서의 시선을 보여주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 결정적인 '발견'의 순간에 카메라는 발견자의 얼굴을 보고서의 시선으로 포착한다.


정보에 대한 권력 차이를 드러내는 장면들

영화는 다양한 장치들로 정보에 대한 인물들의 권력 차를 표현한다. 영화의 초반, 타임즈에서 뭐든 알아오라는 벤의 명령에 워싱턴 직원은 타임즈사로 달려간다. 제자리에 꼿꼿이 서서 명령을 내리는 벤의 모습과,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온 몸으로 내달리는 말단 직원의 모습은 강한 대조를 이룬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인물이 내달리는 장면은 후에 다시 한번 등장한다. 그것은 바로 캐서린(메릴 스트립)의 집에서 아이들이 달리는 장면이다. 거실을 빠르게 뛰어가는 아이의 모습은 말단 직원의 모습과 겹쳐진다. 직접 몸으로 뛰지 않고는 정보를 얻을 수 없는 말단 직원의 처지가 어린아이의 지위가 겹쳐지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아이들이 그려지는 방식은 의미심장하다. 캐서린의 집에 놀러 온 벤은 아이 공을 손에 들고서 꽉 쥐고 있다. 뒤에 선 아이는 공을 돌려달라는 도 못한 채 기다리고 서 있다. 결국 캐서린이 벤에게 그 공을 돌려주라고 말한다. 자신의 공에 대하여 아무런 권리도 주장하지 못하는 아이의 모습은 약간의 정보를 위하여 위험한 도로를 내달리던 직원의 모습, 그리고 베트남전에 대한 진실을 전혀 모르던 당대 시민들의 모습 위로 겹쳐진다.


그러나 포스트가 보고서에 대한 기사를 발행하기로 한 순간부터 영화의 분위기는 반전된다. 직원들은 상하 지위 막론하고 다 같이 방에 모여서 보고서를 본다. 편집장/말단 직원, 어른/아이로 나뉘던 영화의 속성수평적으로 변화한다.

결정적인 변화는 아이들을 다루는 장면에서 엿보인다. 공을 달라는 말조차 못 하던 아이들은 이제 벤과 캐서린이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도 그들 사이를 자유로이 지나다닌다. 오히려 벤은 아이들을 지나가도록 피해 주는 몸짓을 보인다. 또한 레모네이드를 파는 아이는 방의 중심에 서고, 어른들은 서둘러 하나씩 레모네이드를 가져간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조 보고서의 발행 과정에 동등하게 동참하고 있는  보인다. 스필버그는 영화에서 권력의 최하위에 위치한 아이들의 모습을 통하여 시민들이 정보와 권력을 회복하는 과정을 드러낸다. 그 정교하고 세련된 장면들은 이 영화가 왜 수작일 수밖에 없는지를 알게 한다.


방사형 구조를 보이는 장면과, 방사형의 도형


반복되는 방사형의 구조

위에서 언급한 '아이가 레모네이드를 파는 장면'에서 방 한가운데에 아이가 서 있고 사람들이 손을 뻗어 레모네이드를 집어가던 모습이 떠오른다. 이것은 '중심에 선 주인공과 그를 향하여 모여드는 사람들'에 관한 이미지로 압축된다. 이 이미지는 캐서린이 권력 회복하는 순간에 다시 한번 반복된다. 그녀가 신문 발행에 관한 통화를 하순간, 그녀를 중심으로 여러 남자들의 전화가 연결된다. '중심에 위치한 캐서린, 선으로 연결된 남자들' 이미지가 반복되는 셈이. 이 장면들은 권력의 하위에 있던 누군가의 지위가 회복되는 과정을 도형적인 구조로 보여다.


그리고 이 방사형의 구조는 영화의 핵심과 곧바로 연결된다. 누군가가 눈으로 전쟁을 보고(정보의 씨앗) 권력자가 그 보고서를 독점하지만(정보의 중심부) 이것이 신문에 담겨 온 세상으로 뻗어나가는 과정은(정보의 확산) 하나의 거대한 방사형 구조를 이룬다. 이때 확산의 움직임은 중심에서 바깥을 향한다. 이 구조는 약자들이 자신의 지위를 회복할 때 다시 한번 반복되, 그 방향은 역으로 진행된다. 레모네이드를 파는 아이와 캐서린을 향하여 어른들과 남자들이 모여들 때 다시 한번 방사형 구조가 그려지지만, 이때의 움직임은 밖에서 안으로 향하는 것이다. 스필버그는 하나의 구조를 두고 이를 확산과 회복의 순간에 이중적으로 활용한다. 이때 확산의 순간에는 그 중심부에 권력자, 회복의 순간에는 여성과 아이 있. 그러므로 이 영화를 두고서 단순히 페미니즘 영화라서 훌륭하다는 것은 너무 단순한 지적이다. 이 영화의 진정한 탁월함은 권력자의 몰락에서 하나의 도형적 구조를 포착하여 이를 최약자에게 돌려주는 명민함에서 드러난다.  


확산과 회복의 움직임, <더 포스트>

영화를 보며 머릿속에서 줄곧 떠오른 이미지 높은 댐에서  나온 물이 아래로 아래로 흘러 넓은 토지에 스미는 형상이다. 하나의 보고서가 어두운 방에서 해방되어 기자들에게 전달되며, 그들이 쓴 기사가 무수히 많은 신문에 인쇄된다. 그 확산의 물결은 마침내 시민을 움직여서 거리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소리치게 한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높은 댐도 아니요, 물도 아니다. 이것은 오로지 단단한 댐을 터뜨리는 사람들의 움직임에 관한 영화다. 두려움을 참고 벽을 두드려대는 주먹들과 마침내 물이 쏟아져 나오는 순을 영화는 응시한다. 그것은 거대한 확산과 회복의 형상을 그리며 우리 앞에 다가온다. 2017년, 스필버그는 미국이 한때 성취했던 그 뜨거운 순간의 움직임을 다시 한번 회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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