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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Mar 06. 2018

<블랙 팬서>가 비겁한 이유

<블랙 팬서>에 대한 소고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블랙 팬서>는 두 가지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데, 그것은 마블 세계관에 흑인 히어로를 화려하게 데뷔시키는 것과 '인피니티 워'로의 연결고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게다가 세계적으로 흥행에도 성공하였다니 이만한 효자도 없는 것 같다. 물론 <블랙 팬서>에도 비판할 점들은 많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에 대하여 이미 여러 차례 언급된 비판들, 예를 들어 종종 개연성이 없다거나 밸붕(밸런스 붕괴)이라거나 아프리카를 타자화하여 소비한다거나 하는 점들을 다시 언급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흑인 히어로의 탄생 과정에 대하여 마블 유니버스가 갖는 태도에 대한 것이다.


마블을 비롯한 헐리웃은 요즘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에 예민한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폭력의 역사에 대한 반성인 동시에 영화 흥행을 위한 하나의 필수 관문이다. 실제로 <블랙 팬서>의 흥행 돌풍에는 흑인 히어로가 주인공인 영화에 대한 호의적인 시선이 한몫을 했다. 늘 동시대의 이슈(PC)와 히어로의 탄생 배경에 예민한 마블로서는, 흑인 히어로의 탄생 배경을 다루는 영화에 대한 필요를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흑인 히어로의 탄생을 헐리웃에서 다루는 것에는 한 가짐 문제가 있다. 서구권 국가들이 아프리카에 자행한 착취의 역사를 어떻게 언급하고 넘어갈 것인가. 역사를 언급하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그러기엔 마블 세계관이 이미 현실과 연계되는 부분이 너무 많다(세계 대전과 냉전 등의 설정이 익숙하게 등장한다). 역사에 무관심한 캐릭터로 등장시키면 되지 않을까? 흑인 히어로가 동족 착취의 역사에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흑인의 정체성을 가진 히어로라고 볼 수 없다. 그저 피부색만 검은 헐리웃 히어로라고 비판받을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백인 우월주의자들을 불러다 혼내주는 것으로 일단락 지을까? 그렇게 직격으로 역사를 다루는 것은 (넓은 팬층을 의식하는) 마블로서 매우 부담스럽다.


그래서 나온 해결책이 <블랙 팬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영화는 첨단 기술과 자본으로 휘황하게 두른 흑인들의 도시를 등장시키고 그 이미지를 판다. 그러나 지금의 아프리카를 그런 곳으로 등장시키기에는 개연성이 부족하니 궁여지책으로 현실과 동떨어진 무릉도원을 만들어 낸다. 따라서 이 곳은 서구 열강의 흑인 착취의 역사로부터 안전하게 도피된 곳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흑인 히어로는 서구에 대한 직접적인 분노를 갖지 않아도 된다. 이로써 영화는 자신들의 역사적 과오를 직면하고 싶지 않은 백인 관객과, 자본과 과학에서 서구를 압도하는 강인한 아프리카를 보고 싶어 하는 흑인 관객을 동시에 만족시킨다.


그러나 아직도 한 가지 문제가 더 남았다. 여전히 남아 있는 흑인 착취의 역사를 적당히 매듭짓고 넘어가야 된다. 그래서 영화는 주인공의 적으로서 '내부자'를 등장시킨다. 킬몽거는 아프리칸 아메리칸을 대표하는 인물이며 급진주의자다. 그리고 영화는 역사에 민감한 급진주의자들(킬몽거와 그의 아버지)을 모두 폭력적인 캐릭터로 설정한다. 이들은 부족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여태 당한 것을 똑같이 되갚아 주자고 주장한다. 이렇게 '서구권에 대한 복수'의 목소리는 '동족도 죽이는 살인마'의 이미지와 교묘하게 접목된다. 이들은 모두 제거되고, 와칸다는 외부에도 관심을 갖겠다는 약속을 남기며, 불편한 역사 문제는 이렇게 훈훈하게 마무리된다. 헐리웃에 위협을 가하지 않는 안전한 흑인 히어로의 탄생이다. 이 얼마나 깔끔하고 영리한 해결인가.


하지만 이런 태도는 비겁하다. 영화에서 초반에 죽는 클로를 제외하고, 백인의 폭력의 역사를 드러내는 백인 캐릭터는 등장하지 않으며, 오히려 요원 로스는 선한 역으로 끝까지 활약한다. 그들은 블랙 팬서와 동족인 킬몽을 대립하게 한 뒤, 킬몽의 뒤에 숨어서 부끄러운 역사를 에둘러 언급한다. 그리고는 킬몽을 인간적으로 악한 캐릭터로 설정하여 제거하는 방식으로 흑인 히어로와 마블 세계관을 화해시킨다. 물론 아프리카인들이 그들 스스로의 정체성을 백인으로부터 수탈당한 역사에 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헐리웃이 흑인의 정체성을 대면할 때, 그들은 서구권이 아프리카에 자행한 폭력의 역사를 외면할 수 없다. 마블은 블랙 팬서를 새로운 히어로라고 내세우면서도, 부끄러운 역사로부터 배제시키고 과격한 동족을 스스로 처단하게 만든다. 이것을 흑인 히어로라고 부르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영화가 스스로의 비겁함을 가리는 방법은 와칸다를 아프리카 문화로 화려하게 치장하고, 그곳을 서구권보다 훨씬 발전한 곳으로 치켜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 등장한 서투른 한국말과 조악한 한복들이 한국을 대표할 수 없고 그저 한국 관객을 위한 눈요기에 그치듯이, 저런 겉치레로 마블이 흑인의 정체성을 간직한 '블랙 히어로'를 탄생시켰다고 자랑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이용철 평론가가 이 영화에 대하여 한 한 줄 평 "올바른 척해봐야 영악함만 보이는걸"에 동의한다. 마블은 PC를 지키고 시대적 흐름을 적극 수용하는 척 하지만 실상은 그것들을 교묘하게 피해가며 서둘러 봉합한다. 지금 마블이 흑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를 만드는 이유는 그들이 새로운 문화를 선도하기 때문이 아니라, 세계적 트렌드가 딱 그만큼의 PC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 이상의 부분에 대하여 그들은 철저하게 방어적이며 비겁하다. 그래서 이 영화가 트럼프 시대에 반기를 들었다는 주장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마블은 트럼프 시대에 매우 잘 적응하며 양 진영 모두의 눈에 적당히 들 수 있는 히어로를 영리하게 탄생시켰다. 흑인 문화로 치장했지만 흑인의 역사로부터 자유롭고 서구권과 껄끄럼없이 화합하는 흑인 히어로 말이다. 뭐, 오락 영화에 무슨 큰 정의 실현을 바라겠는가. 나도 그 정도의 올바름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블랙 팬서>를 두고서 트럼프 시대에 반기를 든 흑인 히어로물이라는 평가는 잘못되었다. 이것은 그저 트럼프 시대에 잘 조응하는 화려한 미국형 히어로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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