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홍수정 Mar 08. 2018

어인은 왜 고양이를 물었을까, <셰이프 오브 워터>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형태> 영화 비평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내가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을 보며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은 어인(괴생명체)이 고양이를 무는 장면과 영화관에서 스크린을 응시하는 장면이다. 동시에 그것은 의문을 부른다. 어째서 그는 고양이를 물었을까. 그가 온 몸으로 스크린을 응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장면들은 이상하며 심지어 불필요해 보인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장면들이야말로 영화의 핵심이다. 부디 짧지 않은 글을 잘 따라와 주길 바란다.  


하강의 질서

영화의 시작에서 느껴지는 것은 우리를 반기는 유려한 하강의 미학이다. 엘라이자의 욕실에서 시작하여 아래의 극장까지, 카메라는 3개의 층을 어떠한 저항도 없이 부드럽게 하강한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욕실 아래 극장이 위치한다는 정보뿐만 아니라, 그 사이를 미끄러져 내려가는 영화의 질서를 처음으로 마주한다. 티비 속의 남자는 계단을 경쾌하게 내려간다. 카메라는 영화관의 간판에서 정문까지 훑으며 내려간다. 영화는 마치 스스로를 지배하는 것이 하강의 질서임을 알리려는 듯 아래로 아래로 카메라를 이끈다. 이런 움직임은 물의 낙하 운동, 즉 물의 질서를 담은 것이다.


의 호명

그리고 장면이 바뀌어 엘라이자는 연구실에 있다. 연구실 책임자 스트릭랜드가 어인에게 손을 물리자, 엘라이자와 젤다는 어인이 있는 방으로 황급히 뛰어 들어간다. 이때 그녀들이 뛰어들어가는 입구 옆에 찍힌 붉은 손자국을 기억해주길 바란다. 물론 이것은 피 흘리는 스트릭랜드가 찍은 것이다. 이 장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엘라이자를 어인에게로 인도하는 그 붉은 이미지다. 이 위급한 상황에서 어인은 붉은 핏자국으로 그녀를 호명하고 있다.


질서의 전복

그리고 어인은 해부당할 위기에 처한다. 엘라이자는 정신없이 스트릭랜드의 사무실로 달려간다. 스트릭랜드의 사무실은 바닥보다 높은 2층에 위치하고 있다. 그녀는 계단을 부여잡고 그 사무실을 올려다보고, 카메라도 고개를 들어 스트릭랜드의 사무실을 올려본다. 엘라이자, 그리고 카메라가 함께 위쪽으로 시선을 던지는 장면은 순간 불길한 느낌을 강렬하게 내뿜는다. 이것은 하강의 질서에 대한 도전이자, 전복에 대한 예고다. 그 자리에서 엘라이자는 어인의 구출을 결심한다.


그녀의 구출 작전이 상승의 시선으로 포착될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폭력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중심인 '물'은 엘라이자를 감싸 안으며 어인을 살려낸다. 그것은 폭력과 살인을 배제하는 부드러운 물질이다. 그러나 엘라이자가 계획하는 구출 작전은 폭력과 파괴를 감수하는 것이며, 결국 그 과정에서 차가 망가지고 경비원이 죽는다. 그녀는 영화 전체의 질서에 맞서며 끝내 탈출을 성사시킨다.


엘라이자는 질서의 역행을 감수하고 어인을 살리지만, 이때부터 영화의 질서는 말 그대로 '뒤집어진다'. 자일스는 일에서 잘리고 좋아하는 남자에게 거절당한다. 스트릭랜드는 자신의 노란 집에 어울리지 않는 초록색 차를 산다. 느닷없이 초록색을 갈망하는 것이다. (앞의 포스팅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2. 색의 의미 https://brunch.co.kr/@comeandplay/72 참조) 연구실의 직원들은 재밌게도 어인에게 계란을 준다(이것은 원래 엘라이자가 주던 것이다). 영화의 질서는 거꾸로 흘러간다.


이런 질서의 붕괴는 끝내 파국을 부른다. 결정적인 장면이 있다. 자일스는 욕실에서 어인을 보며 너도 나와 같은 골동품이라는 말을 전한다.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영화가 그 대화를 담아내는 방식이다. 카메라는 약 10 숏에 걸쳐서 자일스와 어인의 얼굴을 숏-리버스 숏으로만 잡아낸다. 이것은 물의 흐름처럼 유려하게 연결되던 영화의 경향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마치 얼굴들이 조각조각 분절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카메라는 예전처럼 유영하지 못하고 자일스와 어인 사이에서 몸을 떨며 분열한다. 질서의 역행을 견디던 영화는 이 자리에서 산산조각 나고 만다. 그 파국의 장소가 하필이면 자일스 앞인 것은 아마도 그가 어인의 생명력을 부정(흘러가버린 골동품이라 언급)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질서의 회복, 그리고 영화관

그다음 장면에서 어인은 별안간 자일스의 방으로 건너가서 고양이를 문다. 그것은 자일스와 동일시되기를 거부하는 몸짓일 수도 있고, 살아있음을 증명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는 밖으로 뛰쳐나가며 자일스를 상처 입히기까지 한다. 파국을 맞은 영화는 이 장면에 이르러 기어이 피를 부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음 장면이다. 급히 달려온 엘라이자는 어인의 자취를 따라간다. 그녀는 피 묻은 손바닥 자국을 따라서 영화관으로 내려간다. 피에 의한 호명이 다시 반복되고 있음은 말 할 필요도 없다. 엘라이자는 영화관에서 어인을 만난다. 이때 엘라이자를 쫓아가는 카메라의 움직임을 보자. 집에서부터 계단으로, 극장 입구로, 영화관 객석으로 카메라는 하강의 운동을 이어간다. 비로소 재개되는 하강의 질서이며, 피로써 회복하는 엄중한 규율이다.


영화관에서 어인은 스크린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다. 엘라이자는 서서히 다가와서 그의 가슴에 손을 얹는다. 결국 영화가 인물들에게 피를 묻혀가며 이끈 곳은 바로 영화관이다. 이곳은 길예르모 델 토로가 생각하는 궁극적인 치유의 공간이다. 사실 그것은 영화의 초반부에서 아래로 흘러가던 카메라가 영화관에서 멈출 때 이미 예견된 것이다. 델 토로는 하강의 질서가 마침내 멈추는 곳에 영화관을 위치시키며, 역전된 세계의 질서도 이 곳에서 치유될 수 있으리라고 말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엘라이자와 어인은 자일스의 방에 있다. 영화는 의식적으로 그들이 방으로 올라가는 상승의 운동을 보여주지 않는다. 어인은 고양이와 친근하게 놀고 자일스의 상처를 치유해준다. 이런 느닷없는 평화의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엘라이자는 어인을 살리기 위하여 상승의 시선을 던지고, 어인은 손에 피를 묻혀가며 엘라이자를 영화관으로 이끈다. 이 두 장면은 서로에게 응답한다. 그리고 마침내 스크린 앞에 선 두 사람의 이미지는 완전한 회복을 선언한다. 영화관이 가져온 치유의 마법이다.


그 뒤에 엘라이자와 어인이 결합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들은 영화관의 빛을 받은 뒤 하나로 결합한다. 욕실에 가득 찬 물이 아래로 떨어져서 영화관에 닿던 순간을 떠올려보자. 사랑은 물을 넘치게 하고 아래로 흘러 잠든 관객을 깨운다. 이렇게 하강의 움직임은 다시 한번 아름답게 재현된다.


머무르지 말고 흘러야 한다

엘라이자와 자일스는 욕심 때문에 탈출을 미루고, 그 후 어인은 몸에 이상이 생긴다. 어인이 아픈 이유는 계속해서 집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이는 정지하지 않고 움직여야 함을 의미하며, 물의 속성과 일치한다. 따라서 이 영화의 질서를 다시 요약하자면 하강해야 하고,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래로 흘러야 한다'.


앞서 나온 상승의 시선이 '하강의 질서'를 거슬렀다면, 집에 머무르는 행위는 '흘러야 한다'는 질서를 거스른다. 이것은 바다로 가는 날짜를 달력에 적고, 스트릭랜드가 그 집에 찾아오고, 달력의 날짜를 보고서 바다로 따라오는 방식으로 파국을 부른다. 따라서 엘라이자와 어인이 기어이 바다 앞에서 스트릭랜드와 마주치는 것은 우연이 아니며, 질서를 거스른 자들에게 영화가 내리는 징벌이다.


바다 앞에서 스트릭랜드는 어인과 엘라이자를 총으로 쏜다. 어인은 그에게 다가가서 손으로 목을 치고, 스트릭랜드의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온다. 이때 스트릭랜드는 일전에 영화의 질서를 위하여 희생된 고양이와 겹쳐진다. 다시 한번 손에 피를 묻히고 나서야 어인은 엘라이자를 안고 바다로 흘러간다. 물론 그것이 하강의 몸짓을 내포함은(뛰어내림) 말할 것도 없다.


물, 사랑, 그리고 영화관

영화는 사랑을 물과 동일시한다. 그러므로 이 세계는 주인공들에게 '물의 질서'를 지키기를 엄중하게 요구한다. 물론 일탈은 늘 사랑 때문에 벌어진다. 그러나 사랑 때문에 무너진 질서는 피의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회복되며, 회복된 세계안에서 비로소 사랑이 완성된다. 마지막에 엘라이자의 붉은 옷이 피처럼 보이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이야기를 들려주던 자일스는(나레이션) 마지막에 이르러, 그들의 마지막을 알지 못한다고 전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는 마지막에 환상적으로 완성되는 그들의 사랑을 목격하였는데 말이다. 거꾸로 생각하면, 그들의 해피엔딩은 관객인 우리가 아니면 입증되지 못한다. 이때 우리는 홀로 영화를 보던 영화관 속 어인의 자리로 다시 소환된다. 결국 영화관이 그들의 사랑을 구원하고, 영화관이 그들의 해피엔딩을 증명한다.


이보다 더 절절한 고백을 본 적이 있는가? 이것은 시네마에 바치는 길예르모 델 토로의 사랑 고백에 다름 아니다. 훼손된 세계의 질서는 오로지 영화로써 치유할 수 있다고 그는 믿는다. 나는 거장의 순수한 믿음에 웃음이 나왔지만 이번 한 번은 그의 믿음을 지지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본 당신도 한 번쯤은 그러길 바란다. 영화는 사랑을 완성하고, 마침내 세계의 질서를 회복할 것이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이 전하는 단 한 가지 진리다.

매거진의 이전글 <블랙 팬서>가 비겁한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