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시를 들고 싶은데 평소에 그렇게 잘 떠오르던 구태의연한 표현들이 잘 떠오르질 않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허허. 각자 마음속으로 '내 머리에서 나왔지만 진짜 진부하다' 느꼈던 그 표현들을 다시 떠올려 주시길 바란다.
상투성.
이놈은 간사하다. 처음 언뜻 보면 친구 같다. 잘 못 쓰던 글도 이분의 도움을 받으면 얼추 쓸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보 작가들은 종종 상투성의 유혹에 빠져 너무 쉽게 그것과 손을 잡고 만다. 그 상태에 절여진 작가들은 자각조차 못할 때도 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내 글에 나의 언어가 없다는 무서운 사실을.
이놈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감옥에 처넣으면 되지 않을까? 상투적인 표현의 리스트를 만들어서 영영 금지시켜 버리는 것이다. 어느 작가도 그 표현을 쓰지 못하도록.
하지만 불가능하다. 이놈들은 계속해서 얼굴을 바꾸기 때문이다.
특정 표현을 썼다 해서 상투적인 것이 아니다. '호수 같은 마음', '봄꽃 같은 화사함'. 이런 표현을 썼다고 무조건 상투적인 게 아니다. 그것은 언어의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시를 쓰며 저런 표현을 썼다면 상투적이지만 과학 논문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썼다면 상투적이지 않을 수 있다. 언어는 노래 같다. 오래된 가곡도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부르느냐에 따라 새롭게 들리기도 한다. 상투성은 특정 표현이 아니라 그 사회가 공유하는 언어 체계의 맥락 위에 있다.
이놈들은 죽지도 않는다.
죽였다 싶음 살아나고, 죽였다 싶음 또 살아난다.
새로운 표현을 발견했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쓰다 보면, 어느새 낡은 것이 되고 만다. 독자는 까다로운 손님이다. 어떤 언어가 신선하지 않은지를 금방 알아챈다. 그리고 그 주인장의 방을 더 이상 찾지 않는다. 마치 패션과도 비슷하다. 지금 보기에 세련된 것도 시간이 흐르면 금방 촌스러워진다. 그래서 상투성과의 전쟁은 평생에 걸쳐 이뤄진다. 내가 편하게 쓰는 이 표현이 어느새 관습적이고 지겨운 것이 되지는 않았는지, 끊임없는 점검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