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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Jan 24. 2023

작가의 오랜 숙적, '상투성'

작가들의 오랜 숙적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상투적인 표현'이다. 간단히 말해 상투성. 

예시를 들고 싶은데 평소에 그렇게 잘 떠오르던 구태의연한 표현들이 잘 떠오르질 않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허허. 각자 마음속으로 '내 머리에서 나왔지만 진짜 진부하다' 느꼈던 그 표현들을 다시 떠올려 주시길 바란다.


상투성.

이놈은 간사하다. 처음 언뜻 보면 친구 같다. 잘 못 쓰던 글도 이분의 도움을 받으면 얼추 쓸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보 작가들은 종종 상투성의 유혹에 빠져 너무 쉽게 그것과 손을 잡고 만다. 그 상태에 절여진 작가들은 자각조차 못할 때도 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내 글에 나의 언어가 없다는 무서운 사실을. 


이놈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감옥에 처넣으면 되지 않을까? 상투적인 표현의 리스트를 만들어서 영영 금지시켜 버리는 것이다. 어느 작가도 그 표현을 쓰지 못하도록. 


하지만 불가능하다. 이놈들은 계속해서 얼굴을 바꾸기 때문이다. 

특정 표현을 썼다 해서 상투적인 것이 아니다. '호수 같은 마음', '봄꽃 같은 화사함'. 이런 표현을 썼다고 무조건 상투적인 게 아니다. 그것은 언어의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시를 쓰며 저런 표현을 썼다면 상투적이지만 과학 논문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썼다면 상투적이지 않을 수 있다. 언어는 노래 같다. 오래된 가곡도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부르느냐에 따라 새롭게 들리기도 한다. 상투성은 특정 표현이 아니라 그 사회가 공유하는 언어 체계의 맥락 위에 있다. 


이놈들은 죽지도 않는다. 

죽였다 싶음 살아나고, 죽였다 싶음 또 살아난다. 

새로운 표현을 발견했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쓰다 보면, 어느새 낡은 것이 되고 만다. 독자는 까다로운 손님이다. 어떤 언어가 신선하지 않은지를 금방 알아챈다. 그리고 그 주인장의 방을 더 이상 찾지 않는다. 마치 패션과도 비슷하다. 지금 보기에 세련된 것도 시간이 흐르면 금방 촌스러워진다. 그래서 상투성과의 전쟁은 평생에 걸쳐 이뤄진다. 내가 편하게 쓰는 이 표현이 어느새 관습적이고 지겨운 것이 되지는 않았는지, 끊임없는 점검이 필요하다.  


적당한 용어를 몇 개 정해두고 돌려쓰면서 찍어내듯 글을 쓸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하지만 그건 작가가 아니라 기술자의 일이다. 세상에 없는 자기만의 언어를 발굴해야 하는 작가는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상투적인 언어와 매일 싸워야 하는 운명이다. 하지만 이것이 글 쓰는 이의 행복이자 축복이다(불행이자 저주이기도 하지만). 그리고 이런 지난한 작업도 기댈만한 구석이 있다면 조금은 마음 편해질 것이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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