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밀도 높은 침묵은 사람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여운도 길어서 며칠이 지나도 문득 생각으로 떠오른다. 네가 보여준 배려가 옷에 밴 향수처럼 아직도 내게 남아있다고 말하고 싶어 진다. 하지만 쑥스러워서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향기'라는 촌스러운 표현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그런 사람들일 것이다.
#2
<3000년의 기다림>에 대한 비평을 써서 씨네리에 보냈다.
별 이유 없이 그 영화가 좋았고, 특히나 한 장면이 좋았고. 그에 대한 글을 앞에 두고 곰곰이 생각하다 어떤 깨달음을 만났을 때 잠시 무너졌다. 이 영화는 내게 불가역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글을 쓰고 난 뒤 (아마 잠시 동안이겠지만) 감정의 상태가 변했음을 느낀다.
그래서 그런가.
이번 글은 왜 이다지도 떠나보내기 힘든지 모르겠다.
마감이 끝난 지 며칠이 지났지만 매일 틈틈이 다시 열어본다. 부족해서 속상하기도 하고, 예상외로 좋은 부분들 때문에 뿌듯하기도 하다.그래도 일단 솔직하게 썼고, 진심을 다했으니 그걸로 됐다고 생각한다.
마음을 미처 다 표현하지 못한 남자친구처럼 보내질 못하겠다. 한동안 끌어안고 살 것이다.
#3
영화 잡지사들은 내가 스스로에게 느슨해질 즈음에 날 불러서 인터뷰, 대담을 핑계로 사진을 찍어준다. 그리고 인터넷에 올려 송구스러운 마음을 갖게 한다. 내가 뭘 크게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겸손의 마음을 잊지 않게 해 주어 늘 감사할 따름이다.
농담이고 웹진 <한국영화>에서 진행한 대담에 관한 기사를 홈페이지에 올린 후, 영화 <영웅>생각이 나서 인터넷에서 넘버들을 다시 찾아들었다.
다시 들어도 김승락 배우의 노래는 일품이다.
뭐랄까 정성화 배우야 노래 잘하는 것을 원체 알고 있었지만 김승락 배우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계 일본 배우이고 이미 일본 뮤지컬계에서 유명한 분이라고.
<영웅>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역을 맡아 강한 카리스마를 뿜어낸다. 그 인물의 가치관에 대해 동의할 수 없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겠으나, 그것을 제쳐두고 배우의 노래와 연기만을 보았을 때압도된다. 영화사에 매력적인 빌런은 많지만, 이것은 실존 인물이며 우리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인물이다 보니싱숭생숭하다. 노래를 들을 때마다 감탄하고, 그런 스스로에게 놀라고 '아냐 예술일 뿐이니까'라고 다독이며 매국노가 된 듯한 기분이 든다. 이것이야말로 길티 플레져인가?
유튜브를 찾아보니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구나.. 참, 배우의 능력이란.
#4
뮤지컬 <물랑루즈!>를 봤다.
뮤지컬은 처음 봤는데 역시나 외쿡에서 물 건너온 작품은 소화하기가 어렵다고 느꼈다. 정신 나간 듯 절제 없이 화려한 의상, 안무가 특징인 만큼 기본적으로 피지컬도 받쳐줘야 하고, 이 작품의 화려함을 누를 수 있을 정도의 찐 광기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진짜와 가짜. 아주 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차이인데도 관객은 그 미세한 간극을 느낀다. 예술의 신기함이자 무서움.
이충주 배우는 잘 모르는 상태에서 봤는데 노래를 정말 잘한다. 목소리도 청량하고 노래의 완결성이 높다. 아이비 언니는 대체로 잘하지만 성량의 크고 작은 부분들을 좀 더 매끈하게 컨트롤한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런 불만을 까먹게 만들 정도로 이뻐서 절로 박수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