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한 자도 못쓰겠다고 징징대고 다음날 바로 새 글을 올리는 나는 멋진 여자. 이별의 상처로 죽겠다고 울다가 배고파져서 계란밥 맛있게 먹었던 때가 기억난다.
그러나 통증만큼은 엄살이 아닌 것이, 최근 나의 작가 자아는 힘이 세 질대로 세져서 나머지 자아를 신나게 두들겨 패는 중이다. 글을 쓰는 홍 선생님은 고매하시다. 그런데 성격은 나빠서 참을성이 없다. 더 좋은 글을 가져오라며 패악질이라 매일같이 붓에 맞고 벼루에 처맞는 홍수정은 온몸이 아프다.
며칠 전에 누군가 내게 말했다. 성과와 무관하게 스스로의 가치를 인정하는 부분이 있냐고. 잘해서, 뛰어나서가 아니라 오로지 나라는 이유만으로 스스로가 가치 있다고 생각한 순간이 있냐고. 그 순간 깨달았다. 꽤 오랫동안 그런 순간이 없었다는 것을.
어부로 일했던 헤밍웨이처럼, 작가들이 단순 노동을 선호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이것은 창작 활동을 하는 이들에게 육체노동이 미치는 안정감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자주 언급된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달리 다가온다. 그건 아마도 삶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를 이루는 육체 활동에서 자신의 가치를 일궈내는 작업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생각하게 된다. 잘 쓰지 못했다 하여 맞아도 좋은가. 나는 과연 얼마나 조건 없이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을까. 잘하지 못해도 노력했다는 것만으로, 그저 했다는 것만으로, 혹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기뻐할 수 있을까. 바닥,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나의 가치를 긍정해보고 싶다.
지금 내 마음의 운전대는 작가 자아가 잡고 있다. 나는 그녀의 지랄발광 운전 스타일이 좋아서 조금 위험해도 놓게 할 마음이 없다. 하지만 그 차에 그녀를 제외하고 아무도 타고 있지 않다면 그건 조금 다른 이야기다. 흔들리는 차에 공간을 마련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