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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Jul 04. 2023

영화에 발붙인 비평

그러니까 비평은 자칫 오만해지기 쉽다.

오만이란 다른 이를 눈아래로 보며 저 혼자 저 위에 홀로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가 아닐까. 그렇다면 오만한 평론은 영화의 곁을 떠나 저 하늘 위에 홀로 있는 것들이라 말할 수 있겠다. 이해는 한다. 쓰다 보면 끝도 없이 나가고 싶은 것이 필자의 마음이다. 용납할 수는 없다. 비평은 영화가 나아가길 주저하는, 수줍어하는, 때로 존재조차 몰랐던 미지의 세계에 발을 디딘다. 그곳을 탐색하고 호흡하며 영화 안에 숨겨졌던 잠재력을 펼쳐 보이고는 한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영화와 맞닿아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영화를 팽개쳐두고 저 혼자 멀리멀리 달아나는 비평은 혼란하고, 거만한 것이다. 


어떤 비평들은 장면에 대한 언급 없이 인상만을 나열한다. 마치 계시라도 받듯이 진리라 생각하는 말들을 풀어놓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입증의 의무로부터 자유로운 비평은 없다. 설득하기 위해서건, 아름다움을 위해서건, 영화를 설명하고 자신의 생각을 설득하는 글들은 장면에서 시작해야 한다. 


어떤 글들은 영화에 대한 해석을 넘어 자유 연상의 단계로 나아간다. 영화에 대한 2차, 3차 해석을 넘어 나중에는 작품과 무관해 보이는 듯한 소리들을 한다. 이것은 비평이 아니라 2차 창작물이다. 영화에서 영감 받아 만든 새로운 독창적인 작품이다. 그 자체로 인정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이것을 두고 비평이라 부를 수는 없다. 


나쁜 비평을 만드는 것은 독립성에 대한 유혹이다. 영화에서 시작했지만 내 글만의 고유한 영역을 만들고 싶어 하는 마음 말이다. 또는 영화를 전혀 다르게, 충격적일 정도로 다르게 해석하고 싶은 욕망도 생긴다. 더 충격적일수록 (설득력과 무관하게) 박수치는 사람들도 때때로 있다. 이런 유혹에 빠지면 영화를 해체하여 제 멋대로 조합하는 단계에 이른다. 그리고 이것을 두고 비평이나 해석 능력이라고 착각한다. 뭐 능력은 능력이다. 2차 창작물을 만드는 능력. 일기도, 소설도 좋다. 충분히 재밌고 아름답다면 칭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비평이 아니다. 


결국 비평은, 영화를 평하는 글은, 작품에 발붙인 채 독립적인 영토를 구축할 수 있어야 한다. 작품과 비평 사이. 그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애매하고 긴장된, 한 마디로 괴로운 거리감을 수호하겠다는 의지를 버리는 순간 그것은 비평이 아니다. 너무 가까울 때는 주석에 불과하고 너무 멀 때에는 상상으로 기화한다. 그러니 영화에서 출발해 자신만의 시각과 활기로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그것의 영향권 안에 머무려는 태도가 평자에게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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