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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Jan 08. 2024

관점을 바꾸니, 게으름뱅이는 노력꾼이 되었다

나는 아직도 내 글쟁이로서 밑천을 대학교 1~2학년 때 모두 다졌다고 믿는다. 


그 시절 나는 학문에 뜻이 없고 오로지 다이어트에 꽂혀 있었기 때문에, 수업이 마치면 재빨리 헬스장으로 달려가 2~3 시간씩 운동을 하곤 했다. 달리고 또 무게를 치면 어딘가 해방감이 느껴졌다. 그러고도 남는 시간에는 중앙도서관으로 달려갔다. 나는 우리 학교 도서관이 좋았다. 고등학교 때 상상하지 못했던 (그 당시 내가 느끼기에) '수준 높은' 책들이 가득 쌓여 있어 손대지 않아도 지적인 뽕이 절로 차올랐다. 또 가로수처럼 높은 나무 책장 사이로 은은히 비치는 햇살이 좋았다. 그 햇살 사이로 보이는, 공기 중에 둥둥 떠다니는 먼지마저도 신비롭게 느껴지던 시절. 나는 책을 몇 권 무작정 집고 잡식하듯 읽었다. 그 시간은 맘에 들지 않는 현실과 채워지지 않는 공허에 시달리던 나를 위로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튼튼해질 동안 학점은 바닥을 쳤다. 나는 그것이 노력하지 않은 것에 대한 벌이라고 느꼈다. 그렇게 내가 바라보는 나는 '노력하지 않는 사람'으로 굳어졌다. 비슷한 시간이 반복됐고,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로부터 약 10년의 시간이 흘렀을 때 나는 등단했다. 


등단한 때로부터 8년이 흐른 지금까지 나는 스스로를 '노력하지 않았으나 운이 좋게도 등단한 사람'으로 여겼다. 왜냐면 나는 글을 전공하지 않았고, 머리를 싸매고 읽지도 않았으니까. 내가 생각하는 노력이란 그런 모습이기에.


하지만 관점을 조금 바꾸어 생각해 보니,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졌다. 이 모든 것을 내가 '평론가가 되기 위해 의도적으로 한 것'이라고 생각해 보자. 나는 지독히도 노력한 사람인 것이다. 나는 지금도 글을 쓰기 위해서는 운동해야 한다고 믿는데(수시로 몸을 쓰지 않으면 머리가 안 돌아간다), 나는 성인이 되자마자 부단히도 노력하며 글을 쓰기 좋은 몸을 만들었다. 또 나는 하루에 두세 권의 책을,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끊임없이 읽었다. 심지어 학점을 희생해 가며! 제정신인가? 이것만도 경악스러운데 그 비싼 돈을 주고 다니는 대학원에서조차 전공서적 대신 책을 읽었고, 수험 생활이 끝났을 때는 곧바로 비평 강연을 듣기 위해 문화센터로 달려갔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어디 가서 '등단만을 생각하며 산 미친놈'으로 자기소개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게으르고 자주 실패했다 여겼던 나는 시각을 바꿈으로써 어디에도 없는 노력꾼이 되었다. 물론 이것이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노력'이란 말 안에는 목표를 향해 의식적으로 한다는 뜻이 포함돼 있으니까. 나는 이 모든 것들을 평론가가 되기 위해 하지는 않았다. 그저 그것이 즐거워서, 혹은 그것밖에 없어서 했다. 그런데 목표하지 않았다 하여, 정말 노력이 아닐까? 


어쩌면 노력은 관점의 문제일지도 몰라,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든다. 하다못해 가만히 누워있는 것조차, 지금 당장 일을 해야 한다는 관점에서는 게으름이지만, 휴식해야 한다는 관점에서는 필사의 노력이 아닌가. 어쩌면 우리는 경직된 시각과 천편일률적인 목표의식에 눌려, 우리가 행한 다양한 결의 노력들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어떤 삶도 노력하지 않았다고 섣불리 말할 수 없다. 무언가에 열중했던 그 시간들을 하나로 묶을 결정적인 사건이 아직 오지 않았을 뿐이다. 혹은 그 시간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지 못한 것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던가. 서 말의 구슬을 하나로 꿰어 보배로 만드는 것이 사람의 손이라면, 몽글몽글 맺힌 과거의 시간들을 하나로 엮어 노력의 서사로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의 눈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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