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전호 Oct 11. 2016

우리 합정에서 만나요

별 것 없는 이야기

나는 우리 동네에 익숙해지면서 다른 곳에서의 만남이 자꾸 꺼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합정에 6년 가까이 살고 있다.

이젠 제법 동네 주민 티가 나기도 하고, 무단횡단도 태연하게 하는 편이며, 동네 산책을 할 때면 두세 명쯤 낯익은 얼굴을 보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알은 채 하며 인사를 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 몸에 합정이라는 동네의 유전자를 가지기 시작했고, 우리 동네가 너무 편해졌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우리 동네에선 내가 예상치 못하는 변수를 만나는 경우가 거의 없고, 인생에서 불확실성이 제거된다면 우리가 안고 사는 걱정거리의 90%는 사라지는 것이다. 

이것이 날 자꾸만 합정이라는 안락의자에 빠져들게 만든다. 


지인들에겐 미안하지만 이런 이유로(그러니까 합정이라는 안락의자 때문에) 난 자꾸만 약속을 합정에서 잡는다. 백보 양보해도 상수까지다. 홍대만 해도 벌써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고 북적거리는 거리가 떠올라 꺼리게 된다. 그러니 한강의 남쪽으로 내려가는 건 아예 생각도 하지 않는다. 핫플레이스라고 일컬어지는 강남이나 신사는 나에겐 그저 미지의 세계일 뿐이다. 

일단 이런 나의 어쩔 수 없는 미안함을 표현하고자 한다.

당신들이 싫어 만나지 않은 게 아니라, 우리가 합정에서 만날 수 없었기 때문에 만나지 못한 것뿐이다.


이런 식으로 매번 만남이 집 앞에서 이루 어지 때문에 난 정말 편한 옷차림으로 약속 장소에 나간다. 

집 앞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편안한 옷 차람과 모양새가 용인되기도 했지만, 사실 난 씻기 전과 씻고 난 후의 차이가 그다지 크지가 않았다. 일부러 멋을 내도 별로 티가 나지 않으니 어느 순간 스스로 꾸미기를 포기한 것이다. 들인 노력에 비해 결과를 장담할 수 없으므로 에너지를 쏟지 않는 것이다.

집 앞에서 친구를 만나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친구와 헤어진 뒤 일 때문에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 샤워를 하고, 아무 옷이 아니라 제법 비싼 돈을 주고 산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섰다. 그런데 그 모습이 불과 10분 전의 내 모습과 너무나 다른 것이었다. 나도 꾸미니 제법 괜찮군, 이라는 생각이 스친 건 순간이었고 갑자기 그런 내가 서글퍼졌다.

어느새 난 시간을 투자하면 달라질 수 있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예전엔 씻으나 안 씻으나 별반 차이가 없었는데 말이다.

그건 이제 겪어낸 세월이 얼굴에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고, 그것을 감춰야 되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내 모습을 바꿀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기도 했지만 본래의 내가 점점 지워질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열린 것이니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이 모습으로 내가 과연 합정의 골목을 거닐 수 있을까 생각하니 자신이 없어졌다. 한참을 겨울 속 내 모습을 바라보다 결국 나는 왁스로 멋들어지게 만졌던 머리를 다시 헝클어버렸다. 스스로 익숙하지가 않으니 그건 내 모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결국 반팔 박스티에 운동복, 나이키 러닝화를 신고 나갔다. 

집 앞 카페를 지날 때 주인아저씨와 반갑게 눈인사를 했다. 익숙한 거리를 지나고 횡단보도가 있지만 무단횡단을 했다. 매번 그렇듯 친구와 만나 커피를 마시기 전 얼음물을 한 잔 원샷으로 마시고는 친구와 시시한 세상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일부러 일 때문에 멀리 합정까지 찾아온 손님에겐 나의 편안한 옷차림이 조금 미안하기도 했지만, 난 스스로 나의 합정을 지키기 위해 처절한 전투를 하고 있었으니 이해해주시길.


나이를 먹고 있다.

얻는 것도 있지만 놓아야 하는 것들이 조금씩 더 늘어간다.


그래도 당신이 날 합정에서 만나준다면 난 당신과 처음 만났을 때, 그때의 나로 있어줄 수 있으니 우리 합정에서 만나요.


*동네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그냥 정감이 가요. 그냥.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을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순간의 진실에 대한 고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