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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전호 Oct 15. 2016

사랑합니다. 모나미 볼펜

별 것 없는 이야기

얼마 전, 방 정리를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눈에 익고 편안하고 마음에 쏙 들었던 내 방이 미칠 것만큼 싫증이 나버린 것이다. 

정말 갑자기 말이다. 

당장이라도 책상과 책장의 위치를 바꾸고 고양이들이 항상 날 내려다보는 고양이들의 안식처 캣타워를 형 방으로 옮겨버리고, 정리되어있지 않은 책장의 책들을 모두 꺼내 작가별로 구분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작업을 시작했다.

기껏해야 몇 평 되지도 않는 작은 방이었지만 혼자서 모든 작업을 해내려니 겨울인데도 몸에서 땀이 났다.

풀풀 일어나는 먼지 속에서 처절하게 견뎌낸 세 시간의 작업이 끝이 났다. 새로 배치된 가구들의 위치도 마음에 들었고 책장에 작가별로 정갈하게 꽂혀있는 책들도 마음에 쏙 들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방을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는데 그때 내 책상 위에 놓여있는 열두 자루의 모나미 볼펜이 내 눈에 들어왔다. 청소를 하면서 가구들을 재배할 때 여기저기 숨어있던 모나미 볼펜들을 내가 책상 위에 하나 둘 올려두었는데 그것이 열두 자루나 되었던 것이다. 아니 도대체 이 많은 녀석들이 이 작은 방에서 나오다니 지금까지 어디에 숨어있었던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집을 비울 때마다 고양이들이 어디에선가 하나씩 물어오지는 않았을까 라는 허무맹랑한 생각도 해봤다.


어째서일까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사실 하나가 생각났다. 

3년 전쯤,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에 이사를 오고 내방에 책상을 들여놨을 때 난 동네 문구점에서 검은색 모나미 볼펜을 3세트나 사 왔었다. 무슨 생각이든 떠오르면 반드시 메모를 해야 하는 성격이었고, 또 볼펜을 워낙 잘 잃어버렸었기 때문에 30자루 정도는 있어야 언제든지 볼펜을 손에 쥘 수 있겠다 생각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모나미 볼펜은 정말 싸기도 했으니까. 그러니 30자루를 산다 해도 적당한 식당에서 밥 한 끼 사 먹는 돈 정도면 충분했던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나머지 열여덟 자루의 모나미 볼펜들도 분명 우리 집 어딘가에 숨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엌 싱크대 밑이라든지 아니면 우주의 카오스를 방불케 하는 형 방의 어디라든지. 그 나머지 것들은 아마 우리 집 고양이들이 찾아주겠지, 라는 근거 없는 믿음의 눈빛을 고양이들에게 보냈다. 물론 고양이들이 알아줄 리는 없지만.


나는 모나미 볼펜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모나미 볼펜으로 생각을 적어나가면 두려움도 없어지고 글에 막힘이 없어진다. 그건 아마도 모나미 볼펜은 싼 볼펜이니까 대충 글을 적어나가도 괜찮아, 라는 나만의 황당한 믿음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난 꽤 고가의 만년필을 선물 받아서 가지고 있지만 도무지 그 만년필로는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기가 어렵다. 만년필이 날 바라보며 ‘난 꽤 비싼 몸이라고. 그러니까 나를 사용해서 글을 쓸 때는 사소한 것들을 적을 생각은 하지도 마. 그건 아무래도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으니까 말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만년필을 들고 글을 쓰려고 하면 글을 쓰기 전부터 만년필 앞에 난 움츠려 들고 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모나미 볼펜은 적당하다. ‘내가 널 사용해주는 것만으로도 너는 나에게 감사해야 한다고.’라는 말로 모나미 볼펜을 윽박지른 다음에 떠오르는 걸 닥치는 대로 적어나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만년필은 갑, 나는 을, 모나미 볼펜은 정이 돼버리는 책상 위의 작은 권력구조가 형성된다.


생각 건데 사람은 자신만의 강박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건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되기도 하는데,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라는 자책을 하며 강박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몇 번쯤 시도를 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새 다시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가 버린다.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강박은 세상엔 없다. 내가 모나미 볼펜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책상 위의 모나미 볼펜 하나를 집어 들어 볼펜심을 꺼내보았다. 십 분의 일도 채 사용하지 않은 거의 새것이었다. 그리고 난 아마도 이 볼펜심이 다 사라질 때까지 다시 몇 번이고 볼펜을 잃어버리고, 기억에서 지워버렸다가 문득 다시 찾지만 별로 반가워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잘 사용하지도 않는 만년필을 잃어버린다면 집안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어떻게든 찾아내 손이 닿지 않는 책장의 높은 곳에 고이 모셔둘 것이다. 어디까지나 만년필은 나에게 갑이고 모나미는 나에게 정이므로.

미안한 마음에 네임펜으로 모나미 볼펜에 번호를 매겼다. 1번부터 12번까지. 그리고 30번째 모나미 볼펜이 돌아올 때까지 너희들을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해본다. 

결론이다.

난 모나미 볼펜을 사랑한다.

가끔 녀석이 뱉어내는 똥도 사랑한다.

그러니 30번 모나미야 얼른 돌아오렴.


*최근에 모나미 볼펜 한정판이 나왔습니다. 가격이 상당하더군요. 하나쯤 사도 기념으로 괜찮지 않을까 생각도 해봤지만 사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16번 모나미 볼펜까지만 돌아왔거든요.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을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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