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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전호 Oct 24. 2016

둘째의 열등감

별 것 없는 이야기

나는 아들만 둘 있는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내 아래로는 남자든 여자든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둘째 이면서 동시에 막내였다. 또 무던히도 딸을 갖고 싶었던 어머니의 일방적인 열망으로 딸의 역할까지 맡아 해냈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 여러 가지의 역할을(둘째이면서, 막내이면서, 아들이면서, 딸인) 묵묵히 잘 수행해온 내가 대견스럽기도 하다. 뭐 아무도 알아주지는 않지만 말이다.

일반적으로 둘째로 태어난 사람은 일종의 이상한(둘째 입장에서는 무척 당연하지만 아무도 이 부분을 인정해주지 않으므로) 열등감과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다. 내 주변 여러 명의 둘째들도 이런 걸 가지고 있으니 이건 꽤나 일반적인 이야기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라고 둘째인 나는 주장한다. 동의를 하시거나 말거나.

그 열등감과 피해의식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나보다 먼저 태어나버린 첫째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실 출생의 순서에 있어서 첫째나 둘째나 그 순서에 관여한 바가 전혀 없다. 하지만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결정되어 버린 출생의 순서로 인해 그들이 겪게 되는 인생의 경험은 상이하게 달라지므로 이건 정말이지 불합리하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꽤나 옛날 분이신(내가 겪어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걸 겪어버리신) 우리 할머니에게 첫째 손자(우리 형)는 그 존재 자체로 충분히 대단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할머니에게 손자는 첫째와 그 외의 아이들로 구분되어 버렸다. 손자들 중 그 외의 아이들을 구성하는 숫자가 절대적으로 많다 하더라도 할머니에게 있어 손자라는 의미가 가지고 있는 크기의 대부분은 온전히 첫째 손자의 몫이 되어버렸다. 나는 둘째 손자로서(나이순으로 말이다) 그 외의 손자들 모두의 대표이자 대변인이 되었으며 우리에게만 처절했던 전쟁의 선봉장에 서야만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처절했던 전쟁에서 삐뚤어짐으로 나만의 열등감과 피해의식의 메시지를 가족들에게 전했다. 그러니까 집에서는 정말 활발하고 말도 많았던 녀석이 할머니 집에만 가면 침묵으로 일관했던 것이다. 친척들이 다들 모여 즐겁게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도 어른들의 질문에 나는 침묵했다. 어른들이 생각하기엔 정말이지 괴팍한 행동이었겠지만 그 시절 나의 우주 같았던 침묵은 출생의 순서에 따라 불평등하게 분배된 할머니의 애정의 불합리성에 대한 처절한 투쟁이었다. ‘둘째와 그 외의 손자들도 충분히 첫째만큼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요’라는 것이 나의 주장이었다. 물론 할머니는 나의 이런 주장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려 하기보단 수줍음이 많은 아이로 날 결론짓고는 다시 첫째에게 사랑을 쏟으셨지만 말이다.

그건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할머니 집을 가는 건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고, 어느 정도 나의 침묵 투쟁은 그 결과가 어떠했든 나에겐 나름의 만족감을 줬기 때문이다.

사실 나에게 할머니보다 더 신경 쓰였던 것은 바로 형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형은 자신에게 쏟아지던 많은 관심과 사랑을 버거워했었다. 분명 자신이 받고 있는 그 어마어마한 것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그것은 출생 순서의 우연 때문이었으므로) 받아버린 그것들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했었다. 그런 부분에서 형은 나와 다른 이유로 할머니 집에만 가면 침묵했다. 결국 우리 형제는 사내 녀석들이 왜 이렇게 수줍음이 많으냐, 라는 오해와 핀잔과 걱정을 받으며 자라왔다. 


형에겐 첫째로서의 부담감이, 나에겐 둘째로서의 피해의식이 솜뭉치처럼 얽혀서 등 뒤에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부모님은 그렇게 세세한 것까지 살필 여력이 없으셨고(당신들은 분명 우리들을 공평하게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시절 그 문제들은 온전히 우리 형제만의 몫이 되었다.

나는 부모님과 떨어져 형과 함께 산지 6년이 넘어가고 있다. 

우리는 이제 첫째와 둘째라는 타이틀을 떼어놓은 채 독립된 자아로서 방 두 개짜리 작은 집에서 함께 살고 있다. 거기에 고양이 두 마리도 함께. 형제라기 보단 오히려 친구처럼 지내다 보니 어린 시절 서로가 짊어지고 있던 짐들이 조금씩 옅어지더니 어느새 사리지고 말았다. 

그런데 정말로 그렇게 뭉쳐있던 부담감과 열등감의 솜뭉치들이 등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버렸다고 생각하니 아이러니하게도 그 짐들이 조금은 그립고 조금은 가여워진다. 둘째로서 내가 가지고 있던 열등감은 그 나름의 최선으로 나의 어린 시절을 지탱해줬었다. 분명 열등감 때문에 난 투쟁을 했었고, 어떻게 보면 그것 때문에 견딜 수 있었던 시간들도 많았다. 그런데 이제 그것들이 아무렇지 않게 사라져 버렸다고 하니 조금은 허무하다. 그러면 내가 처절하게 붙들었고 지키고 싶었던 그건 모두 거짓말이었단 말인가? 그렇게 선명했던 것들이 희미해져 버린 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부당하다. 

그리고 하나 더, 그 시절 나는 왜 열등감의 원인이 되었던 형에겐 정작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았었을까? 형과 나는 끔찍이 사이가 좋았다,라고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 우리 형제 사이는 돈독했었고 출생의 순서에 따른 사랑의 분배에 대해서도 정작 서로에겐 불만이 없었다. 그건 암묵적으로 우리의 적은 불합리한 시스템이었고 그 안에서 우리 둘 모두 피해자라는 동료의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를 둘러싼 그 커다란 시스템이 사라져 버렸으니 우린 결국 커다란 전쟁에서 함께 살아남은 든든 전우가 되어버린 걸지도.


아마 세상의 모든 형제들은 서로의 손을 굳건히 잡은 채
그렇게 커다란 시스템과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난 그렇게 성장해왔고, 지금까지 나름 잘 살고 있으므로 그 전쟁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라고 생각한다. 다만 행여 그 과정에서 누군가 나로 인해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조금은 미안할 뿐이다. 그래도 나도 이렇게 잘 살고 있으니, 당신들도 나처럼 잘 살기를 바란다. 모든 걸 겪어내고 그래도 잘 산다면 우린 모두가 승자가 될 수 있을 테니까.


*가끔 누구 다음에 무언가를 해야 할 때 묘한 패배감을 느낍니다. 역시나 둘째는 어쩔 수 없나 봅니다.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은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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