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츠제럴드와 개츠비의 평행이론
필자가 가장 애정 하는 영미권 작가는 "F. 스콧 피츠제럴드"이다.
역사적 배경과 겪어낸 문화가 다른 까닭으로, 한국인인 내가 영미권 작가들의 작품을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래서 사실은 영미권 작가의 책 보다는 한국 작가나 일본 작가들의 책을 자주 읽었다.
가끔 내가 겪어온 세상의 관점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이 책 속에서 펼쳐질 때는 많이 당황스러웠으니까. 책을 읽을 때 작가가 풀어낸 활자의 표면적인 의미를 이해하는 것도 분명 중요하겠지만 그 문장들이 어떤 배경의 옷을 입고 있느냐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의 간극을 좁히기엔 서로가 가지고 있는 다른 문화적 배경이 아쉽기도 하다.
그럼에도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작품이 필자에게 조금은 더 쉽게 다가왔던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여러 작품을 통해서 풀어낸(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위대한 개츠비이겠지만) 이야기가 나와 동떨어진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들의 주된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사랑을 하는 과정에서 내가 품었던 환상들과
그것들이 깨져버리고 말았던 현실
그는 여러 작품 속에서 문화를 떠나서 누구나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그리고 가질 수밖에 없는 사랑에 대한 인간의 본질적인 감정을 다루고 있다. 분명 사랑의 모습은 다양하고 그것들에 정답은 없으겠지만 그 불완전하고 혼란스럽기만 한 과정 가운데 우리가 품게 되는 감정은 비슷하다.
설렘으로 시작한 사랑에 나만의 환상을 투영해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내고, 이내 잔인한 사랑의 현실에 그 환상이 무너지는 과정을 직면하게 되고 마는 것.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때론 잔인해지고 모질어지는 것. 누군가는 그것에 상처를 받고 사랑 자체에 등을 지며 살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그 경험을 자양분 삼아 다시금 사랑에 뛰어들게 되는 것.
각자가 조금은 다른 듯도 하지만 결국 우리는 비슷한 방향으로 사랑이 우리에게 던져준 과정을 수행해 나간다. 그리고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는 그 과정 속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고 성실하게 묘사해낸 작가이다.
오늘 그의 대표작이자 가장 널리 사랑받고 있으며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위대한 개츠비>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다.
작가가 쓴 작품에 작가 자신의 세계관이 투영된다는 것은 필연적이다. 아무리 위대한 작가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이상의 세계를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다양한 삶을 살아봐야 하고 관찰해야 하며 그것들을 사색해서 자신만의 세계관을 구축해야 한다. 그리고 착실하게 쌓여 견고하게 구축된 그 세계관으로 책을 쓰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만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을 성실하게 작품에 쏟아낸 작가도 드물 것이다. 그는 철저하게 자신이 살아낸 삶의 바탕 위에서 글의 소재를 찾아냈다.
세간에 가장 널리 알려진 그의 작품 <위대한 개츠비>와 <밤은 부드러워>는 그의 아내인 젤다와의 사랑, 그리고 그녀와의 결혼생활이 철저하고 정확하게 반영된 소설이었다.
<밤은 부드러워>는 차치하고 <위대한 개츠비>를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실제 피츠제럴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환경(아직 작가로 성공하지 못했고, 젤다에 비해 가난했던) 때문에 젤다와의 사랑을 평탄하게 시작하지 못한다. 물론 후로 작가로서 성공을 거두고 결국 젤다와의 사랑을 이루게 된다.
이런 피츠제럴드의 경험은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와 데이지의 사랑에 반영된다. 속해 있던 신분과 환경이 데이지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던 개츠비는 오로지 데이지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 데이지가 자신을 한 번쯤 봐줄 수 있을 정도의 재력. 아니 그것 이상을 가지고 오 년 만에 다시 데이지 앞에 나타는 개츠비는 이제 그녀를 얻기 위해 자신이 이룩한 재력을 사용하게 된다.
현실에서 피츠제럴드와 젤다의 사랑은 그리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각자의 개성이 워낙 강했고(특히 젤다의 개성이) 피츠제럴드는 젤다의 개성을 온전히 받아주기엔 상당히 보수적이었다. 부부가 파리에 머물던 시절 헤밍웨이가 피츠제럴드에 "그녀는 자네를 망치고 있네."라고 말했을 정도로 부부는 서로의 삶을 자꾸만 불행하게 만들어 갔었다. 그리고 결국 그 결과도 아름답지 못했다.
물론 둘의 사랑과 결혼생활에 대해서는 아직도 다양하게 평가되고 있다. 사실 생각해보면 사랑과 결혼생활의 실패라는 게 어느 누구 한 사람만의 문제는 아닐 테니, 피츠제럴드와 젤다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였던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렇다면 그런 피츠제럴드가 풀어낸 개츠비와 데이지의 사랑은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을까?
"F. 스콧 피츠제럴드"는 왜 책의 제목을 <위대한 개츠비>라고 했을까? 필자는 아무리 책을 읽어봐도, 그리고 디카프리오 주연의 영화를 세심히 살펴봐도 개츠비가 위대한 이유를 찾아낼 수는 없었다. 혹자는 과거의 사랑이자 유일한 사랑이었던 데이지를 얻기 위한 그의 순정 자체가 위대하지 않으냐,라고 평을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건 개츠비의 사랑이 위대한 것이지 개츠비 자체가 위대한 것은 아닐 것이다.
책에 등장하는 개츠비라는 인물은 자신의 사랑인 데이지를 자신의 환경 때문에 얻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잊지 못하고 그녀를 얻기 위해 부자가 돼서 다시 그녀 앞에 나타난다. 만약 개츠비라는 인물에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줘야 한다면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부자가 되어 돌아온 개츠비"일 것이다. 그런데 재력을 키운 것 자체를 위대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유는 개츠비 본인도 그의 재력을 위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에게 화려한 재력은 데이지를 다시 얻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 단 한 번도 목적이 된 적이 없었다. 만약 데이지를 얻지 못한다면 그가 열심히 쌓아올린 재력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줘야 할 곳은 어디일까? 필자는 그것은 데이지를 향한 "개츠비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위대한 건 "개츠비"가 아니라 "개츠비의 사랑"이라고.
사랑은 한 사람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하고 천국 위의 하얀 구름에 올려놓기도 한다.
데이지를 향한 개츠비의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데이지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 그녀를 얻기 위해서 개츠비는 오 년의 긴 시간을 필사적으로 살아낸다. 그 기간 동안 그가 겪었고 얻었던 모든 것든을 온전히 데이지 그녀만을 위한 것이었다.
사랑은 이리도 맹목적이다. 실은 지난 오 년의 시간동안 개츠비가 자신의 내면 깊이 키워갔던 것은 오 년 전, 그러니까 데이지를 처음 만났을 때의 데이지의 모습이다. 그 순간이 마치 영원인 것처럼 간직하고 다시 데이지를 만나기 위해서 자신을 키워 나갔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데이지는 변하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있어줬을까? 아니 처음 개츠비가 사랑에 빠졌던 데이지의 모습은 진짜 그녀의 모습이었을까?
개츠비는 데이지의 집 건너편의 큰 저택을 구해 밤마다 화려한 파티를 연다.
그가 매일 밤 파티를 연 이유는 간단하다. 데이지가 파티에 오게 만드는 것. 그리고 이제는 데이지 못지않게 화려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데이지가 자신에게 오길 바라는 마음.
개츠비의 의도대로 데이지는 개츠비의 파티에 오게 되고 둘은 오 년만에 재회하게 된다.
작별인사를 하러 간 순간, 나는 개츠비의 얼굴에 다시 돌아온 당혹스러움을 발견하였다. 현재의 행복에 대한 희미한 의심이 피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돌아보면 거의 오 년의 세월이었다. 그날 오후만 해도, 눈앞의 데이지가 그가 꿈꾸어왔던 데이지에 턱없이 못 미치는 순간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오래도록 품어왔던 너무나도 어마어마한, 환상의 생생함 때문이다. 그것은 그녀를 넘어서고, 모든 것을 넘어섰다. 그는 자신을 스스로 만들어낸 독창적인 열정 속으로 밀어 넣은 후, 하루하루 그것을 부풀려갔고, 가는 길에 마주친 온갖 깃털로 장식해왔던 것이다. 아무리 큰 불도, 그 어떤 생생함도, 한 남자가 자신의 고독한 영혼에 쌓아 올린 것에 견줄 수 없다._121p
하지만 오 년 만에 다시 재회한 데이지는 개츠비가 바라고 키워왔던 모습과는 다르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책에서도 나와있듯이 그건 데이지의 잘못이 아니다.
문제는 개츠비가 혼자서면 키워나간 데이지의 환상인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상대의 모습을 내 안에서 부풀려 나가고 거기에 자신만의 바람을 덧입혀 어쩌면 전혀 다른 인물을 만들어 내는 것. 이건 사랑에 빠진 우리가 흔히 하는 실수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봐주려 하기보다는 내가 그려낸 모습에 끼워 맞추려 하고 그것으로 인해 갈등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이유로 정당화시킨다.
상처가 된다. 나에게도 상대에게도. 그 상처들은 사랑에 작은 균열을 만들어 내고 종종 쌓아 올린 환상과 함께 사랑 자체가 무너져 내리게 되기까지도.
개츠비는 자신이 키워낸 데이지의 환상과 실제 데이지가 직면하게 되는 상황을 맞이한다. 환상과 현실의 괴리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의 정신은 두 단계를 지나 이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려 하고 있었다. 최초의 당황과 놀라운 기쁨이 지나고, 그는 그녀의 출현이라는 기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너무도 오랫동안 이 순간을, 이를 악문 채, 말하자면 믿을 수 없는 집중력으로 꿈꾸어왔던 것이다. 이제 그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너무 많이 감아놓은 시계처럼 태엽이 서서히 풀려가는 중이었다._116p
만약 개츠비의 사랑이 위대하지 못했다면 개츠비는 데이지와 재회의 장면에서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키워온 환상이 클수록 그 무너짐은 더욱더 처절한 법이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들은 내가 만들어낸 환상과 다른 상대방의 모습에 쉽게 사랑을 접었던 경험이 많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혹자는 사랑과 연애와 결혼 모두,
그런 줄 알았던 사람과 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을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개츠비는 무너지지 않는다. 어쩌면 이미 그가 이뤄낸 많은 것들로 데이지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뛰어난 여자를 만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개츠비는 자신의 환상과 데이지의 모습이 일치하지 않았지만 데이지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거두지 않는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얼마나 놀랐는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 차라리 나를 차 버렸으면 하고 바랐을 정도니까.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어. 그녀 역시 나를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지. 그녀는 자기가 모르는 세계를 잘 아는 나를 아주 해박한 사람으로 생각했어...... 어쨌든 내 야망은 어느새 까맣게 잊고 매 순간 점점 더 깊훅이 그녀에게 빠져들었어. 갑자기 ㅁ다른 모든 일에 신경을 쓰지 않게 된 거야. 내가 하려는 일들을 데이지에게 들려주면서 즐겁게 지낼 수 있는데, 다른 대단한 일을 벌여봐야 무슨 소영이겠어?"_187p
개츠비는 끝까지 데이지를 사랑했다. 자신의 모든 걸 버려도 그녀의 사랑을 얻을 수만 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사랑에 있어서 기다림과 이해만큼 위대한 것은 없다. 어쩌면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위대한 것이 이해한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종종 이해한다는 말을 쉽게 내뱉곤 하지만 그것의 의미는 결코 가볍지가 않다. 상대를 이해한다는 말은 그 이해를 위해 나를 변화시키겠다는 말이다. 그 이해를 위해 내 것을 포기하겠다는 말이다. 그것들이 동반되지 않는 이해한다는 말은 다 거짓이고 허상이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이해했다. 그러므로 개츠비의 사랑이 위대한 것이다.
물론 개츠비의 이해는, 사랑은 비극적으로 끝이 난다. 데이지를 향한 개츠비의 위대한 사랑이 그녀의 허영과 변심과 속물적인 본성을 눈치채지 못하게 그를 무디게 만들었다. 세상적인 기준에 개츠비는 바보 같은 사람이었고 데이지는 매정하고 잔인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대답도 없고, 모든 걸 쏟아부어도 하나도 돌아오지 않았던 사랑이었다 할지라도 개츠비의 인생과 사랑의 순간들을 가장 아름답고 화려하게 빛나게 해주었던 사람은 데이지였음을 부정하진 못할 것이다.
데이지는 개츠비의 사랑이 향하는 정점에 서 있는 여자이다. 그리고 가장 욕(?)을 많이 먹는 인물이기도 하다. 개츠비의 사랑이 위대하다면 그녀는 그 위대한 사랑의 유일한 오점일 테니 말이다.
그녀는 그가 처음 만난 '상류층' 여자였다. 그는 자기 나름의 수단으로 그런 부류의 여자들을 꽤나 겪어왔지만 늘 거리감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데이지에게는 완전히 빠져버렸다._185p
게다가 다른 많은 남자들이 데이지에게 목을 매고 있다는 사실도 그를 흥분시켰다. 그의 눈에는 그녀가 점점 더 가치 있는 존재로 보였다. 구애자들의 고양된 감정이 그녀의 집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열렬한 마음은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지는 것을 그는 느낄 수 있었다._185p
데이지는 첫 만남부터 개츠비를 사로잡는다. 개츠비의 말 처럼 그녀는 개츠비와는 다른 세상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화려함 속에서 살아가는 여자 었으며, 화려함 속에 있을 때 자신의 의미를 발견하는 여자였다. 그녀가 톰과 결혼한 것도 그가 그녀의 화려함을 만족시켜 주었으며, 그의 아내가 된다면 화려함을 더욱더 키워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화려함을 사랑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데이지의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너무, 너무 아름다운 셔츠들이야" 그녀가 흐느꼈다. 두터운셔츠더미에 파묻혀 그녀의 목소리가 띄엄띄엄 들려왔다. "너무 슬퍼. 한 번도 이렇게, 이렇게 아름다운 셔츠들은 본 적이 없거든."_117p
개츠비의 집에 초대되어 개츠비가 가지고 있는 셔츠들의 화려함을 보고 데이지는 슬퍼한다. 현재 자신이 누리고 있는 삶보다 개츠비의 삶이 더 멋있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톰의 아내로서 데이지가 누리고 있는 상류층의 삶은 어느 누구보다도 풍족했으며 화려했다. 그녀는 가지면 가질수록 허영을 키웠고, 더욱 공허해졌던 것이다.
개츠비를 다시 만난 데이지는 이미 자신이 결혼한 상태이고 딸도 있기 때문에 개츠비에게 가지 못한 것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었다. 개츠비라는 사람을 사랑했지만 그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슬퍼한 이유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던 개츠비라는 남자가 어쩌면 지금의 자신이 누리고 있는 삶보다 더 화려한 삶을 선물해 줄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개츠비의 그것을 자신이 차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데이지는 개츠비와 재회한 그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톰과 개츠비를 두고 저울질을 했다. 둘 중 누구의 옆에 있어야 자신이 더욱 화려한 삶을 살 수 있을지를.
그의 사체가 발견된 지 삼십 분 뒤에 나는 아무 주저 없이 본능적으로 데이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그날 오후, 그녀와 톰은 여행가방을 챙겨 일찌감치 멀리 떠난 상태였다._204p
그녀의 선택은 결국 톰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개츠비가 쌓아온 부와 명예가 모래 위에 지은 성처럼 쉽게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데이지는 톰에게 간 것이다.
데이지의 사랑의 본질이 사람이 아니라 환경이라는 걸 알아채지 못했던 개츠비는 끝까지, 끝까지 데이지를 바라보고 기다린다. 죽음의 마지막 순간까지 데이지의 전화를 기다리면서.
앞에서도 말했지만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서 가장 비호감 캐릭터는 톰보다는 데이지일 것이다. 그녀의 사랑은 철저하게 물질 중심적이었고, 온전히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데이이지의 이런 사랑을 비겁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필자는 데이지의 사랑을 이해하긴 어렵지만 인정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의 배경이 된 1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국 상황을 생각해보자. 물질은 넘쳐나기 시작했고 어떤 방법이든지 부를 쌓아 올리고 그것을 호사스럽게 누리는 것이 일반적이고 타당한 멋진 삶이라고 여겨졌던 시대이다.
물질이라는 것 자체가 우상시되었던 시대에 그것을 갈망하는 것은 비겁하거나 잘못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남자들은 자신이 쌓아 올린 부를 과시하기 위해 밤마다 파티를 열었고, 여자들은 자신의 외모를 아름답게 꾸미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어 스스로의 가치를 올리기에 바빴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꾸고 어쩌고 저쩌고 따위의 논리나 일반론을 그 시절의 여자들이게 들이댄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남자에게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방법이 재력이었다면, 여자들에겐 외모를 가꾸어 재력을 가진 남자를 차지하는 것이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데이지는 철저하게 시대정신에 부응한 여자였다. 그리고 그녀가 개츠비가 아니라 톰을 선택한 것은 그녀로서는 충분히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아쉬운 건 개츠비의 사랑이다.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했던 사랑이었다. 물질이 넘쳐나고 그것이 우선시되던 시대에 순수한 사랑을 갈망했고 그것에 삶을 바쳤던 개츠비가 바보였을지도.
당연하고도 당연하게 <위대한 개츠비>는 개츠비와 데이지가 이끌어가는 사랑의 과정만으로도 충분하 책이다. 특히 개츠비의 사랑을 풀어내는 피츠제럴드의 필력과 문체는 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다는 것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필자가 아직 책을 읽지 않은 독자를 위해 몇 가지를 덤으로 붙여보고자 한다.
책이 워낙 유명하고 전 세계적으로 널리 읽혔기 때문에 <위대한 개츠비>는 한국에 소개된 번역본도 상당히 다양해다. 굉장히 뛰어난 작가분과 문학가들이 번역을 했기 때문에 어떤 출판사의 책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번역의 문체도 차이가 나고 원문과 다른 오역도 발생했을 것이다.
번역본이 태생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건 번역가의 개입일 것이다. 그것들이 번역본 마다 약간의 차이를 만들어내게 된다.
필자는 김영하 작가가 번역한 문학동네 출판사의 책을 읽었다. 어느 책이든 번역본이 완벽할 수는 없다. 가능하다면 작가의 문체가 한 번의 번역 과정 없이 실려있는 원서를 읽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만 적어도 이 책은 어느 번역본을 읽더라도 충분하지 않을까?
<위대한 개츠비>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선 피츠제럴드가 소설을 집필했을 당시 미국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세계 1차 대전이 끝나고 세계의 주도권의 구도에 약간의 변화가 생긴다. 전통적인 강국이었던 영국과 새롭게 물질적 부를 쌓으며 급속도로 성정 해나가던 미국.
소설에서 부유하고 운동도 잘하며 가문도 좋았던 톰은 영국을 상징하고, 급속도로 재력을 키워 명성을 얻어갔던 개츠비는 미국의 모습을 상징한다.
갑자기 등장한 개츠비를 경계하고 그의 부를 전통적이지 못한 졸부로 여기는 톰과, 이제는 자신의 시대라는 것을 엄청난 돈을 쏟아부은 화려한 파티로 과시하며 데이지를 톰으로부터 빼앗으려 했던 개츠비.
이 두 대립하는 구도를 이해하면 <위대한 개츠비>가 왜 시대적 소설이며 시대의 변화를 투영한 소설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의 해석과 리뷰를 찾아보면 데이지를 향했던 개츠비의 사랑을 나르시시즘에 빗대어 평가한 평을 많이 접하게 된다. 필자는 어느 정도 동의하는 편이다.
데이지를 향했던 개츠비의 사랑이 나르시시즘으로 변화하는 계기는 그가 키워낸 환상과 오 년만에 재회한 데이지의 모습의 간극에서 시작된다. 그때부터 개츠비는 데이지를 사랑했다기보다는 데이지를 사랑했던 자신을, 데이지를 얻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왔던 그 시절의 자신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해석들이니 정답은 없다.
데이지라는 인물을 관찰하면서 계속해서 떠오르는 인물은 바로 피츠제럴드의 아내 젤다였다. 거의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데이지의 캐릭터는 젤다와 겹쳐진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피츠제럴드의 작품은 스스로의 삶과 꽤 많은 부분에서 닮아 있다.
실제로 젤다는 사치스러웠고, 방탕한 소비생활을 즐겼으며, 파리에서 조차 파티를 즐겨하는 파티 광이었다. 또 오랜 세월을 신경쇠약이라는 병으로 남편인 피츠제럴드를 어렵게 했으며, 젊은 프랑스 비행기 조종사와 불륜을 저지르기도 한다. 결국 피츠제럴드는 알코올 중독에 빠지고 그의 작품 활동에도 슬럼프를 맞이한다.
물론 피츠제럴드는 개츠비처럼 순정남은 아니었다. 그 또한 바람을 피웠고, 젤다를 한 명의 정체성을 가진 개인(실제로 젤다는 문학과 미술 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으로 인정하지 않는 보수적인 남편이었다.
게다가 필자는 이런 젤다의 개성 강한 모습이 오히려 피츠제럴드의 작품에 많은 영감을 줬다고 판단하는 편이기도 하다.
피츠제럴드와 젤다가 겪었던 실제 사랑과 결혼생활을 살펴보면 책을 이해하는데 약간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는 어쩔 수 없이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실제 삶과 결부시켜 읽을 수밖에 없었다.
책에 등장하는 개츠비와 데이지가 실제 피츠제럴드와 젤다와 너무나도 많이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것이 절대 아름다울 수만은 없다는 것.
사랑의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너무나도 더럽고 비겁하며 치졸해질 수 있다.
그렇다면 각자가 상대방에게 투영했던 각자만의 사랑 속에서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일까?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 속의 데이지를 끝까지 믿고 사랑했던 개츠비와, 자신이 스스로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화려함을 버리지 못하고 개츠비를 저버렸던 데이지중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란 말인가.
결국 둘 모두 자신이 사랑하고자 했던 것을 끝까지 사랑했다.
그것이면 충분했기에 어쩌면 마지막까지 데이지와의 사랑의 환상 속에서 죽어간 개츠비도, 무너져 내리고 있는 개츠비를 냉정하게 돌아섰던 데이지도 행복했을 것이다. 둘 모두 자신이 원하는 모습의 사랑을 이루었을 테니까.
화려하고 아름다운 부흥의 시절 미국. 그 안에서 더욱더 화려하게 빛났기에 슬펐던 개츠비의 안타까운 사랑.
하지만 그는 끝까지 자신의 생을 살았다. 가질 수 없는 걸 끝까지 가질 수 있다고 믿으며 그것에 생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 사랑이고 행복이라면, 마지막까지 개츠비는 충분히 사랑했고 넘치게 행복했을 것이다.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을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